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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 청소년의 사부 “동기 부여엔 운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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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 청소년의 사부 “동기 부여엔 운동이죠”

입력
2017.06.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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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금 없어 자살한 학생 사건에 충격

20여년간 탈선 아이들에 애정

유도 가르치며 도복ㆍ식비 지원

자식 같은 제자들 “살아갈 용기”

“퇴임하면 운동시킬 공간 걱정”

박용호(오른쪽) 경위가 한 청소년에게 직접 유도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곽주현 기자
박용호(오른쪽) 경위가 한 청소년에게 직접 유도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곽주현 기자

“뻣뻣하게 하지 말고 부드럽게, 그렇지!”

20일 오후 인천경찰청 지하1층 상무관에서 도복을 입은 학생들 10여명이 겨루기 연습에 한창이었다.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상대에게 달려들던 한 아이는 자신의 등이 바닥에 먼저 닿자 “한판이야?”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습 시간 내내 욕설도, 싸움도 없었다. 한때 학교폭력 가해자였거나, 세상을 버리려고 했던 아이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체육관 구석에서 아이들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 이가 있었다. 박용호(60) 경위, 인천 남동경찰서 학교전담경찰관(SPO)이다. 그는 20여년 전 잠깐의 일탈을 저지른 전교 1등 학생이 합의금이 없어 구속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에 충격을 받고, 이후 강력계를 떠나 청소년들에게 시간을 쏟아왔다. 2013년부터 시작한 유도 수업도 그 중 하나다. “삐뚤어진 아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건 성취감과 동기 부여죠. 운동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도 수업은 방황하던 청소년들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중학생 이동훈(15)군은 “2년 전만 해도 세상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다”면서 “운동을 하고 나서는 내가 막 살면 사부님과 코치님에게 피해가 간다는 생각에 그럴 수 없게 됐다”고 털어놨다. 이 날 체육관에 나온 청소년들은 박 경위를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별일 없이 전화를 걸어 끼니를 챙겨주고, 가족 사정이 힘든 아이를 찾아가 끌어안고 울어주기도 하는 박 경위를 보면서 이들은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아이들에겐 없던 꿈과 목표도 생겨났다. 4년 동안 수업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정성빈(17)군은 “경찰이 되고 싶다”고 당차게 말했다. 전국 아마추어 유도대회에 나가 은메달을 두 번이나 딴 정군은 벌써부터 경찰 시험을 공부하고 있다. “대회 나가서 메달도 따고 장학금도 받으니까 어른들도 친구들도 나를 다르게 보더라”는 정군은 “전북 고창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그걸로 체육학과에 입학하는 게 목표”라고 웃었다.

박 경위는 요즘 표정이 밝지 않다. 이달 29일 정년 퇴임을 하는데, 아이들이 계속 모여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고민 탓이다. 체육관을 빌려주고 있는 인천경찰청에서는 이후에도 계속 공간을 쓸 수 있다고 하지만, 다른 경찰들이 함께 쓰는 공간이라 아이들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단다. 박 경위는 “내가 더 이상 경찰이 아니게 되면 부담이 되는 게 사실”이라며 “아이들이 운동을 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을 질 수 있겠나”라고 했다. 또 사비로 해결해오던 아이들 도복이나 식비 등도 걱정이다.

박 경위는 아이들의 변화를 직접 목격한 만큼, 정부에서 책임을 지고 탈선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당장 교육청과도 대화를 진행 중이다. “아이들은 꾸준한 관심과 애정만 있으면 바뀝니다. 아이들이 운동을 하면서 자존감을 찾고, 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돌아가는 과정까지만 역할을 담당하려고 해요. 쓰러지기 전까지는, 몸과 마음을 바쳐 아이들을 위해 살지 않을까요?”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이달 말 퇴임하는 인천 남동경찰서 박용호 경위. 곽주현 기자
이달 말 퇴임하는 인천 남동경찰서 박용호 경위. 곽주현 기자
박 경위를 만난 후 대학 진학에 성공한 제자가 그에게 보낸 감사의 메시지. 박 경위는 "아이들이 보낸 문자는 모두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곽주현 기자
박 경위를 만난 후 대학 진학에 성공한 제자가 그에게 보낸 감사의 메시지. 박 경위는 "아이들이 보낸 문자는 모두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곽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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