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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하는 엄마...내 인생 살고 싶어요

입력
2017.05.0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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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경진 기자 jinjin@hankookilbo.com
일러스트 김경진 기자 jinjin@hankookilbo.com

저는 남편도, 아이도 있는 ‘어른’이지만 엄마에게 휘둘리며 살아요. 제 인생은 없네요. 엄마는 저의 모든 것을 간섭하고 효도를 강요해요. 결혼한지 3년째인 우리 부부를 엄마는 아이 취급해요. 평범한 잔소리 수준이 아니에요. 휴지통 놓는 위치, 설거지하는 시간부터 양가에 전화 드리는 횟수까지 일일이 통제해요. 주말 일정도 엄마가 일방적으로 정해 놓고 통보하고요. 제 취향이나 생각은 전혀 존중하지 않아요. 사위인 남편에게도 이래라 저래라 하고요.

부모님이 가까이 살면서 두 돌 된 아이를 키워 주세요. 그래서 더 도망칠 곳이 없어요. 엄마는 제 아이를 엄마 자식인 것처럼, 제가 엄마에게 빌려 키우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육아를 마음대로 하려고 해요. 적절한 훈육이 필요하다고, 너무 옛날 식으로 키우면 안 된다고 얘기해도 듣지 않아요. 무조건 다 받아주는 외할머니를 아이가 저보다 더 따르는 것도 속상해요.

엄마는 저와 홀시어머니의 관계에도 집착해요. 그냥 잘해드리라고 조언하는 수준이 아니라, 모든 걸 시어머니 입장에서 생각하고 저에게 희생하라고 해요. 생신 선물은 뭘 해라, 명절에 몇 밤 이상 꼭 자고 와라, 고분고분하게 굴어라… 결혼 예단도 엄마 고집 때문에 과하게 했어요. 사실 저는 무뚝뚝한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요. 엄마는 제 성격 때문이라고 저를 비난해요. 엄마는 시이모는 상관 없지만 시고모한테는 잘하라고 해요. 시고모는 시아버지 대신이라면서요.

엄마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어요. 외할아버지는 돈 문제, 여자 문제를 끊임 없이 일으키며 외할머니를 괴롭혔어요. 그래도 엄마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보다 많이 그립다고 해요. 잘 이해가 안 돼요. 아빠는 폭력적이었어요. 아빠 때문에 외가와 의절하고 지냈고요. 엄마는 이혼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여자에겐 남자가 있어야 한다, 겉보기에 온전한 가정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실행하진 않았어요.

살면서 엄마와 만든 즐거운 추억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엄마가 결혼 전엔 저에게 집착하지 않았어요. 가까이 사는 동생 부부에겐 별로 간섭하지 않아요. 왜 저한테만 그러는 걸까요? 엄마에게 화도 내보고, 울면서 호소도 하고, 편지도 간절하게 써봤지만 전혀 달라지지 않네요. 제가 어리고 몰라서 그렇다고만 해요. 엄마 때문에 괴로워서인지 저는 점점 더 무덤덤한 사람이 돼 가네요. 제발 제 인생을 저답게 살면서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제 행복을 찾고 싶어요. 항상 엄마를 의식해야 하는 갑갑한 삶이 싫어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정아씨ㆍ가명, 32세, 회사원)

“정아씨 어머니는 왜 그럴까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알아 보기로 해요. 어머니는 특정 상황에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무의식적으로 부인하는 사람 같아요. 정아씨 외할아버지가 자신을 힘들고 화나게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살아온 거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요. 외할아버지를 마음 속에서 미화시켜야 엄청난 분노를 감당하고 견딜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런 심리적 방어 기제를 ‘반동 형성’이라고 해요.

어머니는 또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맞춰 주고 자세를 낮추려 하는 사람으로 보여요. 어머니의 내적 기준으로는 시어머니와 시고모가 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아씨가 밉보일까 걱정하는 겁니다. 어머니는 힘 있는 사람에게 미움 받거나 버려지는 걸 굉장히 두려워하는 사람이기도 해요. 문제는 그게 정아씨가 아닌 어머니의 두려움이자 기준이라는 거죠. 어머니는 시어른들의 감정은 지나치게 살피면서도 정작 정아씨 마음은 신경 쓰지 않아요. 어머니의 행동에는 평생 걸쳐 느낀 결핍과 한이 응축돼 있는 것 같네요.

정아씨는 그렇게 고통스러우면서도 왜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까요? 어린 아이는 제대로 생존하기 위해 부모에게 의지하고 애착 행동을 합니다. 부모가 지속적으로 거절하거나 귀찮아하면 아이는 절망해서 더 이상 부모에게 다가가지 않아요. 겉으로 보기엔 독립적인 아이로 자라는 듯 하지만, 그건 ‘허상의 독립’일 뿐입니다. 아이는 항상 결핍을 느끼고 그걸 채우고 싶어 하지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이 버거워서 정아씨를 충분히 사랑하고 돌봐주지 않은 것 같아요. 정아씨는 뒤늦게 결핍을 채우고 관심과 보호 받으려는 마음 때문에 어머니 곁에 머물러 있는 걸로 보여요. 어릴 때처럼 외로워지는 것보다는 지금이 낫다는 생각을 정아씨 자신도 모르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정아씨 부부를 괴롭히는 어머니를 좋아하지도 않고 양육 방식이 못마땅한데도 어머니 곁에 사는 고통을 감수하는 거지요.

어머니 입장에서 정아씨는 막 대해도 떠나지 않는 만만한 대상이자 주변 사람 중 가장 약자입니다. 어머니는 그런 정아씨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힘을 휘두르면서 과잉 통제하는 것으로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에게 억눌려 산 상처를 해소하려 하는 것 같아요.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정아씨는 빨리 어머니로부터 멀어져야 해요. 성인이 된 정아씨의 마음은 충분히 단단하지 못해요. 어머니가 정아씨 가족의 행복을 망칠까 겁내고 있어요. 어머니가 키우고 있는 정아씨 아이가 정아씨처럼 별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으로 성장할까 두려워하고 있어요. 어머니와 멀어지려면 신체적, 물리적 거리를 둬야 해요. 먼 곳으로 이사 가는 걸 권할게요. 어머니와 자주 만나지 말고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세요.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가끔 만나세요. 안부 전화를 억지로 자주 하지 않아도 돼요. 어머니와 관계를 끊거나 원수처럼 지내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부모님께는 정아씨 마음이 편안한 선에서 잘해드리면 돼요. 그게 진정한 효도입니다. 자식의 도리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요. 정아씨 어머니의 기준은 과도하게 높습니다. 정아씨 기준을 갖고 사세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머니를 떠나는 과정에서 생기는 충돌을 두려워하지 말아요. 정아씨가 남편, 아이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아이를 보다 안정적으로 키우기 위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을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핵가족’이라고 부르는, 부부와 자녀가 중심이 되는 삶은 당연한 거예요. 정아씨가 택하는 게 정답이에요. 어머니가 반발하며 세게 나오면 응대하지 말고 묵묵히 듣고 있다가 준비된 순간에 행동하세요. 그래야 어머니를 포기시킬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정아씨가 어머니를 설득하거나 말로 이기긴 쉽지 않아요. 어머니의 성격을 이제 와서 정아씨가 바꿀 수도 없고요. 당장 부딪히는 게 겁나서 어머니와의 갈등을 내버려두면 언젠가 곪아 터질 가능성이 커요. 이사 가는 문제와 어머니와 거리를 두는 문제 등을 놓고 남편과 충분히 논의해서 합의된 의견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머니가 없으면 아이는 누가 키울지 걱정되나요? 제일 잘 키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아씨입니다. 일하는 동안은 믿을 만한 기관에 맡기면 돼요. 그래도 가족인 어머니가 키워주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요. 하지만 나와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면서 편안하게 키워준 엄마, 지금 관계가 편안한 엄마가 아니라면 되도록 아이를 맡기지 않는 게 좋습니다. 또 두 돌 지난 아이를 지나치게 허용적으로 키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아이 엄마는 정아씨예요. 정아씨가 양육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으면 아이가 자란 뒤에 후회할지도 몰라요. 책을 읽고 전문가를 찾아가면서 정아씨가 방관자가 아닌 주인공이 돼서 아이를 주도적으로 키우세요. 이제라도 아이와 밀착해서 밀접한 관계를 맺으세요. 어린 정아씨에게 결핍을 준 어머니처럼 되는 실수를 저지르면 안되잖아요. 어머니와 부딪히는 게 두렵다고 아이를 외롭게 해선 안돼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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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씨는 자각하지 못했을 수 있지만 마음의 결핍이 있고 외로운 사람 같아요. 어린 정아씨는 너무나 괴로워서 외롭다는 감정을 선명하게 느낄 겨를조차 없었는지도 몰라요. 정아씨가 어머니 곁에서 이제라도 결핍을 채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잘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아요. 그럼 어떻게 하냐고요? 아이가 있잖아요. 정아씨가 어머니에게 못 받아서 마음 아팠던 것들을 아이에게 해주세요. 엄마로서의 그런 행동이, 아이가 보이는 반응이 정아씨를 채워 줄 겁니다. 정아씨는 자신의 인생을 지탱하는 밧줄을 꼭 잡고 여기까지 왔어요. 정아씨가 꼭 붙들고 지켜야 할 건 어머니가 아니라 남편, 아이와 함께 만들어갈 행복한 미래라는 걸 기억하세요. 두려워하거나 뒤돌아 보지 말고 정아씨 스스로를 믿으세요.”

취재ㆍ정리=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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