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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언니, 그냥 던져요

입력
2018.03.06 14:55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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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겨울올림픽이 끝난 지 열흘이 지났지만 예상치 못한 감격은 아직도 여전하다. 가장 신선한 경험은 역시 컬링. 컬링은 어찌 보면 단순한 게임이다. 스톤을 30.48m 떨어진 목표 지점(하우스)에 얼마나 가깝게 그리고 많이 밀어 넣느냐가 승패를 결정한다. 그래서 야구에서 투수가 차지하는 만큼은 아니지만 컬링에서도 투척은 아주 중요하다. 자기 스톤을 하우스에 넣으면서 상대방 스톤을 하우스에서 제거해야 한다. 언뜻 보면 알까기처럼 보인다. 물리 선생님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스포츠다.

컬링에는 운동역학과 열역학이 작용한다. 스톤의 무게는 대략 20㎏.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스톤을 세게 던지는 게 아니라 얼음 위를 미끄러지다가 그저 슬쩍 놓는 것 같은데 어떻게 묵직한 스톤이 얼음에 들러붙지 않고 30m 이상을 미끄러져 갈까?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 배운 바에 따르면 마찰력은 물체의 무게와 표면의 마찰계수의 곱으로 정의되는데 말이다.

다행히 물리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컬링 스톤이 멀리 가는 데는 물리학적인 이유가 있다. 스톤 바닥 전체가 얼음과 접촉하는 게 아니라 바닥에 붙어 있는 폭이 5㎜에 불과한 얇은 고리만 얼음과 접촉하기 때문이다. 또 컬링 경기장 바닥은 거울처럼 반질반질한 빙상 경기장과는 달리 우둘투둘하다. 얼음판에 물을 뿌려서 얼음 표면에 페블(자갈)이라는 작은 알갱이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우둘투둘한 페블과 스톤 바닥의 고리만 접촉하는 것이다. 그만큼 마찰력이 줄어든다. 고등학교 때 물리를 열심히 배운 독자는 이 대목에서 비웃을 수 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마찰력의 세기는 접촉면의 넓이와는 무관하다’고 가르치니까 말이다. 교과서는 접촉면이 이상적으로 매끄러운 조건을 상정한 것이지만 이런 이상적인 조건은 우리 주변에는 없다. 컬링 경기장도 마찬가지다.

물리학을 잘한다고 운동을 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축구에서 말하는 바나나킥에는 마그누스 효과라는 게 작용한다. 하지만 마그누스 효과를 잘 이해하는 물리학자들이 마그누스 효과를 들어보지도 못한 축구 선수보다 바나나킥을 더 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운동은 몸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겠지만) 언뜻 보기에 컬링은 다른 경기보다는 체력이나 체격이 결정적인 요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물리학자들이 컬링을 더 잘할 수 있을까? 아닐 것 같다. 왜냐하면 물리학을 잘 아는 사람은 더 헷갈리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컬링을 할 때 스톤 위에 달려 있는 핸들을 살짝 돌린다. 스톤 진행 방향에 회전을 주기 위해서다.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오른쪽으로 휘고, 반시계방향으로 돌리면 왼쪽으로 휜다. 이렇게 회전하는 물질은 컬링 스톤밖에 없다. 다른 모든 물체의 휘는 방향은 그 반대다. 그 이유에 대해 물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댄다.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은 아직 제대로 모른다는 뜻이다. 물리학자들이 다른 사람보다 컬링을 더 잘하지는 못하는 게 꼭 헷갈려서만은 아닌 것 같다. 충격량과 기하학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당구조차도 물리학자들이 특별히 더 잘 하지는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컬링이 그저 좀 어려운 알까기라고 하면 이렇게 재미있지는 못할 것이다. 컬링은 알까기보다는 체스에 가깝다. 고도의 두뇌 게임이기도 하다. 스킵이 던지는 마지막 7, 8번째 스톤으로 게임이 결정되는데 이때를 위해 사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 가드가 바로 그것. 가드를 정확한 위치에 설치하고 그 뒤에 숨고 또는 상대방의 가드를 제거하는 게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 스윕이라고 하는 비질을 잘 해야 한다.

컬링 게임을 하도 봤더니 어느 나라와 경기할 때였는지 모르겠다. 우리 팀의 스킵인 영미 친구는 자기가 마지막 스톤을 회전시켜서 상대편 가드 뒤로 과연 넣을 수 있을지 자신하지 못했다. 확신이 서지 않으니 작전을 세우는 데 주저할 수밖에. 이때 나는 분명히 들었다. “언니, 그냥 던져요.” 영미 동생이든지 아니면 영미 동생 친구가 한 말이다. 자기네가 비질을 해서 스킵이 투척한 스톤의 길을 열어줄 테니 믿고 편하게 던지라는 뜻이다.

평창 겨울올림픽과 패럴림픽은 매우 성공적인 평화 올림픽으로 치러지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여전히 심상치 않다. 지금이야말로 평화를 향한 시민의 협력이 필요할 때다. 대통령 혼자 스톤을 잘 던진다고 타개될 만만한 상황이 아니다. 대학 시절 동지였던 정희용은 “한반도를 안전한 하우스로 만들고 거기에 우리가 던진 스톤을 쌓아 착실히 점수를 따려면, 시민사회 전체가 ‘안경 선배’와 같은 스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작년 이맘 때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이제는 빗자루를 들고 스위퍼가 되어야 한다. 전쟁 위험을 부추기는 외세와 경거망동하는 자들을 부지런히 쓸고 닦아내야 한다. 우리 평화는 우리가 지키자.

빗자루를 들고 대통령에게 이야기하자. “언니, 그냥 던져요.”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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