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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동등한 파트너십” 재산 절반 요구한 CEO의 아내

입력
2016.02.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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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받고 이혼 못한다"

"아내 가치 모욕감에 소송"

1998년 결혼평등협회 설립

동등한 부부관계 정립 운동 전개

대학 교육과정으로 발전시켜

주부 위상·여성 권익 제고에 기여

로나 웬트는 GE캐피털의 전 CEO 게리 웬트의 부인으로 만 32년을 산 뒤 남편의 이혼 요구에 재산 동등분할을 요구하며 소송을 걸었다. 그는 자신의 소송이 단순한 돈 문제가 아니라 주부의 가치, 아내에 대한 법과 사회의 평가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97년 소송 당시의 로나 웬트. AP
로나 웬트는 GE캐피털의 전 CEO 게리 웬트의 부인으로 만 32년을 산 뒤 남편의 이혼 요구에 재산 동등분할을 요구하며 소송을 걸었다. 그는 자신의 소송이 단순한 돈 문제가 아니라 주부의 가치, 아내에 대한 법과 사회의 평가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97년 소송 당시의 로나 웬트. AP

로나 웬트와 게리 웬트 부부는 1965년 결혼해서 만 32년을 살며 두 딸을 낳았다. 결혼할 무렵 로나는 음악 교사, 게리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학생이었고, 97년 이혼 당시 로나는 전업 주부, 게리는 GE캐피털 CEO였다. 게리는 95년 이혼을 요구했다. 합의 조건으로 그가 제안한 건 현금 800만 달러와 연 25만 달러의 이혼수당, 부부가 살던 집이었다.

로나는 격분했다. 그는 이혼은 그렇다 쳐도 “결혼 생활에 (내가) 기여한 바를 낮게 평가 받은 데 대한 모욕감”때문에 더 화가 났다. 남편이 제시한 돈은 로나의 추산으로는 재산의 10%에 불과했다. 그는 남편 명의 재산의 정확한 절반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의 결혼은 일종의 파트너십이며, 자신은 그 관계에 10~20%가 아니라 100% 헌신했다는 것, 따라서 누군가 관계를 끝내고 싶다면 결별 조건은 50대 50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간단명료한 계산이었다. 로나는 자신의 소송이 단순한 이혼 재산분할의 문제가 아니라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또 법원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의 문제라고 98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주장했다.

그 소송으로, 또 이후 다양한 결혼 평등운동으로 주부와 아내의 위상과 여성 권익 제고에 기여한 로나 J.웬트(Lorna Jorgenson Wendt)가 2월 4일 별세했다. 향년 72세.

로나는 1943년 미국 노스다코타 주 미노트 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루터파 교회 목사였고 어머니는 당시의 전형적인 전업 주부였다. 어머니는 딸에게 “주부라면 모름지기 자신보다 먼저 남편과 가족을 챙겨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1998년 2월 ‘포춘’ 인터뷰에서 로나는 “내 어머니와 그 시절 여인들이 삶으로 보여준 것처럼 나도 최고의 아내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남편에게) 결코 ‘싫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이들이었다”고 말했다.

10대 때 가족은 위스콘신 주 리오 시로 이사했다. 로나와 게리는 고등학교 동급생으로 만나 금세 사랑에 빠졌고, 나란히 위스콘신대를 졸업한 뒤 단돈 2,500 달러로 신접살림을 꾸몄다. 음악을 전공한 로나는 음악 교사가 돼 대학원생 남편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 68년 첫 딸이 태어났다. 게리는 취직했고, 로나는 직장을 그만뒀다. 게리가 75년 코네티컷 주 스탬퍼드의 GE캐피털에 자리를 잡기까지 가족은 게리 직장을 따라 텍사스로 애틀란타로 플로리다로 이사를 다녔다. 남편이 새 직장에 적응하는 동안 아내 역시 물론 두 딸과 함께 새 동네에 적응해야 했다. 낯선 교회에 나가야 했고 낯선 이웃들과 사귀고…, 그 역시 힘든 일이었다.

85년 43세의 게리는 GE캐피털의 CEO가 됐다. 98년 말 사직할 때까지 그는 GE캐피털을 그룹 내 최대 수익 자회사로 키우며 잭 웰치 당시 회장의 후임 물망에 오를 만큼 성공한 기업인이 됐다. 로나 역시 ‘좋은 주부’에서 ‘좋은 기업인 아내’의 역할을 익히기 위해 책까지 읽으며 공부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도 남편이 직장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좋은 평가를 받고 출세할 수 있도록, 가사와 더불어 부부동반 모임 같은 게리의 요구에 최대한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첫 딸을 출산한 지 일주일도 안 돼 남편 직장 신년 만찬에 참석한 일도 있었다고 로나는 말했다. “아내는 남편 일에 방해가 될 만한 어떠한 요구도 해서는 안 되며, 좋은 엄마 즉 자녀를 잘 통제하는 엄마여야 하고….” 그는 아이들이 아파도, 병원에 갈 일이 생겨도 남편에게 전화 걸어 부담 주는 일은 꿈도 꾸지 않았다고, “남편이 퇴근한 뒤 가정 일에 관한 한 조금도 걱정할 일이 없도록”모든 걸 원만하게 관리하는 일이 자신의 역할이었다고, 말하자면 자신은 웬트 패밀리의 CEO였다고 말했다.(포춘 위 기사)

옷차림에서부터 말투까지, CEO의 아내로서 갖추고 행해야 할 공적인 역할도 적지 않았다. GE캐피털 해외지사 확장 등을 위한 비즈니스 여행에 연 평균 5,6개월씩 따라 다니는 것도, 남들이 보기엔 놀러 다니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에겐 엄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95년 말 남편의 이혼 요구를 받은 지 일주일 뒤 집에서 크리스마스 예복파티를 치렀다고 한다. “언제나 웃어야 해요. 어떤 자리든 원해서 온 것처럼 행동해야 하고, 누구든 반가운 척 응대해야 하죠. 언제나 그런 척(acting as if). 내 인생은 온통 ‘그런 척’이었어요.”

그림2'포춘' 1998년 2월호(당시 월간지) 표지의 로나 웬트.
그림2'포춘' 1998년 2월호(당시 월간지) 표지의 로나 웬트.

저 사연들은 물론 소송 중에 또 이후 이런저런 인터뷰에서 그가,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 한 말들이었지만, 남편의 직장 생활 애환이나 성공한 기업인의 출세 무용담에 ‘세뇌된’ 주부(여성)들에게, 또 성공한 기업인들에게, 신선한 자극이자 두려운 각성의 계기가 됐다. 그의 이혼 소송은 유명인의 가십을 넘어 바로 자신들의 문제이기도 했다. ‘포춘’이 98년 2월호 표지에 로나의 사진을 싣고 ‘기업인 아내의 가치는 얼마? What a Corporate Wife Worth?’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게재할 정도였다.

소송의 최대 쟁점은 재산 분배 비율이었다. 당시 미국 주들 가운데 부부공동재산(community property)을 인정하는 곳은 9곳에 불과했고, 로나가 소송을 제기한 코네티컷 주 법과 이혼 소송 판례들은 재산 동등 분할이 아닌 ‘적절한 분할(equitable distribution)’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따르고 있었다. ‘적절함’은 물론 재산 총액과 결혼 기간, 재산 축적 기여도, 나이, 건강 등등을 감안한 적절함일 테지만 언제나 ‘동등함’에는 미달하는 적절함이었다. 특히 기업인 남편의 이혼 소송에서는 성공이 이례적일수록 남편의 특별한 재능이 ‘특별히’인정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소송에서 로나는 “그(게리)는 집안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묻는 법이 없었고, 늘 보살핌을 받는 존재였다. 만일 그가 주부들처럼 장 보고 자녀 보살피며 집을 관리해야 했다면, 누군가가 그를 위해 그 모든 일을 대신해주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지금과 같은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NYT, 2015.2.6) 포춘 인터뷰에서 그는 “만일 결혼이 동등한 파트너십이 아니라면 왜 결혼을 하겠는가? 만일 남편이나 판사가 ‘당신은 혼인관계 지분 30%를 갖고 남편은 70%를 가지라고 한다면, 당신은 결혼을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소송의 또 하나의 쟁점은, CNBC에 따르면, 스톡옵션과 연금 등 소송 시점의 미실현 자산에 대해서도 아내에게 분할 요구권이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만일 재산권이 인정된다면 게리의 재산은 최대 1억3,000만 달러에 이르고, 법원이 로나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할 경우 분할 재산은 게리가 제시한 돈의 10배 가까이 늘어나야 했다. 게리측 변호사는 그의 재산은 이혼 요구 시점인 95년 말 기준으로 2,100만 달러에 불과하고, 부동산 등 로나에게 제시한 금액은 이미 전 재산의 약 절반이라고 주장했다. 판결 직전인 97년 말 그의 재산은 두 배 가량 불어났는데 그건 공제받은 세금과 스톡옵션 등 그가 이혼 후 회사를 더 다녀야만 실현될 수 있는 자산이라고 해명했다.

법정 공방은 치열했다. 그 과정에서 부자들의 사생활, 예컨대 로나가 이혼 수당 증액의 근거로 제시한 것들- 미용 경비 월 1,350달러, 옷값 연 1만 달러, 외식비 연간 1만8,000 달러 등- 도 화제가 되곤 했다. 그는 “나는 CEO의 부인에게 요구되는 삶을 사느라 그런 값비싼 옷들을 입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볼티모어선, 1997.12.30) 하지만 앞서 97년 1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그는 “물론 나는 1,000만 달러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왜 그는 9,000만 달러를 가져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여론도 들끓었다. 설문조사 결과 기업인 아내의 의무- 자녀 양육 가사 사업여행 파티 자선사업 등-가 남편의 성공에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 응답자는 여성의 51% 남성의 28%였다고 ‘포춘’은 전했다. 1983년 출간된 미국의 대표적 생활 법률 백과 ‘미국 법 안내 Guide to American Law’는 부부의 법적 의무 항목에서 “남편은 아내를 부양할(support) 의무를 지니고 아내는 남편을 섬길(serve) 의무를 지닌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 관념은 이혼 시 남편은 전 재산을, 아내는 위자료를 갖는다는 걸 의미했다. 70년대 이후 여성 노동인구 비율이 늘어나고 쌍방 책임을 묻지 않는 이혼(No-fault divorce)이 증가하면서 법원 판결도 점점 더 공평한 재산 분할을 지향하게 됐다.

97년 12월 법원은 게리에게 재산 분할액 2,000만 달러와 연간 이혼수당 25만2,000달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현금과 부동산 신탁 등의 절반에 스톡옵션 등 미실현 자산은 극히 일부만 산정된 금액이었다. 519쪽에 달하는 의견서 재판부는 “법원은 기업인들이 큰 관심을 갖고 이 보고서를 읽으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고 썼다. 부부는 각각 항소했지만 주 항소법원은 기각했다. cnbc는 양측이 소송 후 따로 공개되지 않은 금액으로 재산분할에 합의했으며, 로나측 변호인에 따르면 “정확히 반반은 아니지만 상당한(substantial) 액수였다”고 보도했다.

98년 10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로나는 이혼 재산분할 일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법원이 말하는) 적절한 분배는 전적으로 판사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만하면 됐지(enough is enough)’라는 정서가 법원 분위기를 지배한다. 가정법원 판사는 제 각각이다. 가정 분위기에 따라, 부부 관계에 그들의 생각과 선입견이 다를 수밖에 없다. (…) 근본적으로 룰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법원의 성 차별적 관행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

게리 웬트는 98년 재혼했다. 그는 그 해 GE캐피털을 사직했고, 1년 뒤 4,50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으며 컨세코(Conseco)라는 보험ㆍ금융회사의 CEO가 됐다가 2002년 회사 부도유예신청 직전 퇴직했다. 현재는 ‘디어패스자산운용’이란 회사의 경영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다. 2001년 비즈니스위크 인터뷰에서 게리는 “로나가 이혼을 커리어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바꿀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녀 때문에 잠을 설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로나는 98년 결혼평등협회(Equality in Marriage Institute)를 설립, 기혼 여성 권익 옹호와 정서적 법률적 재정적으로 동등한 부부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내가 집에서 하는 일이 돈을 벌어오는 사람의 일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협회의 주된 임무는 결혼의 의미를 남녀 사회 구성원에게 홍보하는 일, 예컨대 사법적 현실과 권리를 교육하는 일이다.” 그는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98년 9월 뉴저지 주 리지필드 공공도서관 강연에서 그는 주부들에게 “가계 자산을 철저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아는 게 힘”이라고 말했다. “미국인의 결혼 중 약 절반은 이혼으로 끝나는 게 현실이다. 나는 결혼 계약서가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혼한 여성은 미국의 새로운 빈민층이 되고 있다.”

협회는 2006년 로나의 모교 위스콘신대가 펼치던 4W(For Women, Well-being, Wisconsin, World) 운동에 합류하며 ‘MORE(Money + Relationship + Equality) 프로그램’이라는 교육과정으로 계승됐다. 대학과 지역 사회, 온라인 상의 전 연령대 여성과 커플들에게 노동과 인간 관계에서의 평등의 가치를 교육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여행과 스포츠를 즐겼던 그는, 청소년에게 탐험과 생존기술 등을 가르치는 비영리 국제 아웃도어 교육기관인 ‘Outward Bound International’의 이사회 부의장을 맡기도 했고, 코네티컷 스탬퍼드 오케스트라 이사 겸 모금활동가로 일하는 등 자신이 원하던 바의 삶을 살았다. 그에게는 두 딸 외에 17년 동안 함께 한 반려(Spencer Dean Wallin)가 있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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