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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남자친구 소식 들은 죄? 2배가 된 형량

입력
2015.02.05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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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말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 김상준)는 8년간 학대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김선희(가명ㆍ39)씨에게 "진지한 반성이 없다"며 징역 3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6년을 선고했습니다. 살인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중죄이지만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1심이 법정 최저형량에 해당하는 징역 3년을 선고 한 것은 남편 A씨로부터 겪었던 선희씨의 고통을 참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중대한 양형 요소를 놓쳤다"며 1심 배심원과 재판부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결국 남편을 죽인 선희씨는 진지한 반성이 없었던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기 때문에 형을 늘려야 한다고 재판부는 판단했습니다. 과연 판사가 선희씨에게 없다고 지적한 '진지한 반성'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1976년 충남 천안에서 청각ㆍ언어 장애가 있는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선희씨는 아버지가 다른 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6살 때 어머니가 가출하고 오빠도 뒤따라 집을 나가면서 선희씨는 아버지와 단둘이 생활하게 됩니다. 자연히 언어 습득이 늦었고 학교에 가서도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후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한 선희씨는 성적은 하위권이었지만 성실한 태도로 임했고 친척의 도움으로 점차 생활에 활기를 띄어갔습니다.

하지만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25살에 결혼을 한 후 선희씨의 일상에는 다시 그늘이 집니다. 남편의 잦은 폭행이 이어지면서 결국 이혼을 하고 카드 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외판원 등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오다 30살이 되던 해 A씨와 재혼했지만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판결문에는 사건이 벌어진 작년 3월까지 A씨가 선희씨에게 가한 대략적인 학대의 내용이 드러나 있습니다. "피고인은 신혼초기부터 시작된 남편 A씨의 폭력과 무시, 과도한 성관계 요구 등으로 우울감과 무력감을 경험해 왔음. 약 2년 전부터는 A씨로부터 성기와 가슴을 성형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음. (살인) 사건 발생 며칠 전에도 A씨는 수술을 종용했고 A씨가 직접 해당 병원에 전화 상담까지 했으나 피고인은 수치심을 느껴 병원을 찾지 않았고 A씨의 불만이 고조됨."

사건 전날 밤인 지난해 3월 18일, A씨는 선희씨에게 또다시 학대를 시작합니다. 선희씨가 평소 알고 지내던 A씨의 거래처 사장 부인에게 '과거 당신의 남편이 내 남편과 함께 유부녀들과 술자리를 가졌었다'고 말한 것이 화근이 돼 거래처 사장과의 관계가 곤란해진 A씨가 선희씨에게 화풀이를 한 것입니다. A씨는 선희씨를 폭행한 후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고 "네가 그런 말을 한 사실이 확인되면 죽을 줄 알라"며 협박했습니다.

선희씨 주장에 따르면 평소보다 심한 공포감을 느낀 선희씨는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칼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A씨가 다시 선희씨에게 완력을 행사하자 선희씨는 칼을 휘둘렀고 몸싸움을 벌인 끝에 A씨는 숨집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장기간에 걸쳐 가정 폭력에 시달려 온 것으로 보이고 범행 전날에도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은 점 등으로 인해 범행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범행동기에 참작할 사정이 있고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징역 3년을 선고합니다.

하지만 뜻 밖에도 선희씨 사촌동생이 구치소 접견을 가서 한 말이 항소심에서 형을 3년이나 더 늘리는 결정적인 빌미가 됐습니다. 사촌 동생은 선희씨에게 "오빠(선희씨의 남자친구 B씨)가 도움 못 줘서 미안하대, 보고싶대, 어떻게 하냐" "그 오빠 지금 와 봤자 도움 줄 게 아무것도 없어 못 오겠대, 보고 싶어 죽겠다더라"는 말을 전합니다. 선희씨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판결문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대화 내용에 주목합니다. "피고인이 B씨와 평소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정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자신의 남편을 살해한 피고인이 구치소 접견 시간을 이용해 자신의 남자친구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는 등 사사로운 대화를 나눈 사정을 고려해 보면 1심의 양형판단에 있어서 고려 대상이었던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에 대한 존재 여부에 대하여 심각하게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을 죽인 여자가 어떻게 남자 친구의 소식을 듣고도 반성한다고 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결국 선희씨는 그저 남자친구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3년을 더 감옥에 있게 됐습니다.

실제로 B씨와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법정에 나온 B씨의 증언입니다. "2012년 6월 선희씨 집에 에어컨을 설치하러 갔다가 알게 됐다. 2013년 여름부터 일주일에 2번 정도 만나 식사를 하거나 선희씨 차에서 대화를 했다. 선희씨로부터 부부싸움하면 많이 맞고 원하지 않는데도 부부관계를 가져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고 살라는 조언을 해줬다. 선희씨와 성관계를 한 적은 없다. 선희씨의 얼굴이 예쁜 편이고 유쾌해서 통화를 자주 했다. (사촌 동생을 통해) 선희씨의 근황을 알아보려고 했다."

선희씨와 B씨가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밝힌 것이 100% 사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재판부가 지적한 '진지한 반성'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진지한 반성'이란 판결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지만 법리적으로 정해진 바는 없습니다. 범행에 대한 자백과 피해자에 대한 사죄, 보상 및 합의 노력 여부, 반성문 등으로 피고인의 의사를 추정할 뿐이라 판사마다 그 기준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선희씨의 경우처럼 1심에서 인정된 '진지한 반성'이 항소심에서 부인되는 경우는 이례적입니다.

'진지한 반성'이 감형 요소로 인정되는 것에 가장 많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선희씨 같은 성폭력 피해자들입니다. "성폭행을 저지른 게 명백해 보이는 피의자들도 대부분 수사 전에는 범행 자체를 부인하면서 합의 하에 관계를 가졌다거나 피해자가 꽃뱀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런데 기소가 되면 반응이 싹 달라진다. 다신 그런 일이 없을 테니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비는 식이다. 피해자가 선뜻 합의를 해 주지 않으면 '합의금에 눈이 멀었다'는 마타도어를 일삼기도 한다. 피해자의 눈에는 형을 적게 받기 위한 꼼수로 보이지만 법원은 진지한 반성의 요건에 해당한다고 보고 감형을 해 주는 경우가 많다. 진지한 반성이라는 모호한 기준이 재판부의 주관적 판단을 빌어 이용되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법률 지원을 전문으로 하는 한 변호사의 말입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선희씨가 살인행위에 대해서만 후회하는 것으로는 반성이 부족했다고 본 것 같습니다. 남편에게 학대를 받던 시간 동안 B씨에게 의지했다 해도 구치소를 찾아온 사촌 동생에게 "난 남편을 죽인 여자로 속죄하는 중이니까 남자친구 B씨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했어야 한다는 것이겠죠. 재판부는 선희씨에게 살인에 대한 죄값뿐만 아니라 B씨와의 만남에 대한 죄값도 함께 묻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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