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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뜨거운 소설 ‘군함도’

입력
2016.06.2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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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에게 기억을 준 것은 미래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나무는 뿌리가 있어 가지에 열매가 맺는다. 눈에 안 보인다고 뿌리를 경시하다가는 잎도 열매도 없이 말라 죽는다. 어제의 뿌리 없이 내일의 열매는 없다. 역사는 어제의 나를 잘 다듬어 더 나은 내일의 나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한수산 장편소설 ‘군함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인접한 섬 하시마(端島)의 해저탄광으로 끌려가 죽음의 노동에 시달렸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처절한 이야기다. 패배의 기운이 짙어갈수록 전쟁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일본은 조선에서 무차별 징용을 자행한다. 부유한 집안의 자식으로 비교적 편안히 살아왔던 주인공 지상은 형을 대신해 징용대상자가 된다. 그리고 전쟁에 미친 나라와 주권을 잃은 나라 가운데서 일어나는 격랑에 휩쓸린다.

지옥 같은 노동의 나날 속에서 지상은 생각한다. “선조 임금 때 그렇게 당하고도 3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조선은 또 똑같은 짓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여기 끌려와 있는 것도 그때와 끈이 닿아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더 원통하다. 우리는 왜 지난날에서 배우려 하질 않는가. 왜 이다지도 과거를 잘 잊어버리는가.”

내일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부 징용인들은 탈출을 시도하지만 더러는 주검으로 돌아오고 더러는 실패의 대가를 혹독히 치른다. 그래도 자유를 향한 그들의 몸부림은 그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분노로 견디고 어떤 날은 서러움으로 견디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나라가 없으면 사람도 아니라는 걸 그들은 알게 된다. 견디다 못한 지상은 연장자면서 정신적 지주인 명국, 뜨거운 피를 가진 동년배 우석 등과 함께 치밀한 탈출 계획을 세운다. 결국 지상과 우석은 제각기 탈출에 성공하지만, 자유의 몸이 되어 밟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군함도에서는 갱 속에서, 나가사키에서는 원폭의 구름 아래서 등장인물들은 하나둘 죽어간다. 사라지는 그들 뒤로 절규가 남는다. “이것이었구나. 나라가 없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지상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지상의 아내 서형은 모든 만남은 기다림이 만드는 거라 믿고 긴 세월을 버텼다. 결국 그 기다림이 지상을 살린다. 그 외에도 소설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저마다의 인생을 다시 살려내는 데 있어 작가의 붓이 하늘에 닿는다. 이틀간 밥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빠져 읽었다.

원폭으로 모든 게 날아가 버린 나가사키의 밤거리에서 지상은 말한다. “그것이 남아 있기에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제 나는 그 소중함을 안다.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이의 사랑이라는 것을. 여기서 흘러간 날들이여. 나가사키는 나에게 조국이 무엇인가를 가르쳤다. 잊지 않으리라. 어제의 고난과 상처를 잊지 않고 담금질할 때만이 내일을 위한 창과 방패가 된다.” 지상의 외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한다. 나라를 잃은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의 우리는 그에 못지않은 상실을 안고 산다. 젊은이들은 진로가 보이지 않고 기성세대는 가정을 못 지킬 정도로 일터에서 밀려난다. 나가사키 상공을 뒤덮었던 폭격기들의 공포와 뭐가 다를까.

‘군함도’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총 950페이지에 달해 웬만한 장편소설 세 권 분량을 넘어선다. 그럼에도 시간을 바칠 충분하고 넘치는 가치가 있다. 오늘 내 앞의 ‘군함도’를 견뎌내면서, 거기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헤엄쳐 나오면서 나의 내일은 한층 견고히 설계된다. 뜨겁다 못해 펄펄 끓어 넘치는 소설 ‘군함도’를 읽으며 나에게 묻는다. 내가 잃어버린, 혹은 내가 외면하고 있던 자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면서 내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던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잠시 멈춘다. 모든 역사가 오늘의 역사이듯 모든 문학은 지금 나의 이야기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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