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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나라가 망해야 사는 사람들

입력
2018.09.1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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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심상은 자연현상을 편견 없이 관찰해서 이로부터 보편적인 법칙을 이끌어 낸다는 귀납이다. 태양계 행성운동에 대한 케플러의 법칙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가 남긴 천문관측 자료를 분석해 행성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얻었다. 그 첫 번째는 타원궤도의 법칙으로,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의 궤도 모양이 타원이라는 내용이다. 이는 행성궤도가 원일 것이라는 케플러의 원래 신념과 다른 결과였다. 개인적으로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브라헤의 데이터를 자신의 신념보다 더 신뢰했기에 케플러는 위대한 발견에 이를 수 있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이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자신의 신념과 다른 데이터를 접하면 먼저 그 데이터의 정확성에 의문을 갖게 된다. 물론 숙련된 과학자들은 자신의 신념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열어둔다. 그러나 미국의 위대한 과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이나 스티븐 와인버그가 말했듯이, 원래 알려진 값과 큰 차이가 나는 실험값을 얻으면 그 실험에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부터 갖게 마련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열심히 찾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미 알려진 값에 가까운 결과를 얻으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잘못된 점을 찾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까지는 인간의 한계를 지닌 과학자의 정상적인 과학 활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애초에 편견이 완전히 배제된 실험이나 데이터 분석은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데이터 조작이라는 악령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면 이 결정적인 ‘한 걸음’의 경계는 훨씬 더 흐릿해진다. 자신의 신념이나 희망사항에 부합하는 정보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확증편향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신념이나 희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편향된 데이터를 수집하고 심지어 조작해 유포하는 행위는 악질적인 사기행각에 다름 아니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폭우처럼 쏟아지는 이른바 ‘경제망국론’ 뉴스들이 모두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경제성장률과 고용지수, 가계소득 등을 다뤘던 몇몇 주요 기사에서 소개한 통계수치의 비교대상이 잘못되었다든지 표본선택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경제망국론 뉴스 전체의 신빙성에 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자리를 잃은 50대 여성이 자살했다는 기사는 이런 분위기에 정점을 찍었다. 이 기사의 기본적인 사실관계에 문제가 있음이 밝혀지자 정부 정책에 딴지를 걸기 위해 허위로 가짜뉴스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해당 언론사에서는 가짜뉴스가 아니라며 적극적으로 해명했으나 직접적인 자살사유가 최저임금 때문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편견 없이 현상을 분석해서 현 정부의 경제정책 때문에 나라가 망해간다는 결론을 내렸다기보다, 문재인 정부를 실패한 정부로 만들기 위해서 나라가 망해가는 증거를 만들어 낸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문제는 경제망국론이 아무리 근거가 없더라도, 경제주체의 심리가 실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결국엔 경제망국론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경제망국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한국 경제가 망해가는 뉴스만 발굴하거나 심지어 조작할 수도 있다.

이 모든 현상이 낯설지 않은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도 “아마추어 정권이 경제를 망친다”는 기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참여정부의 경제성적표가 썩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망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오죽하면 일부 월스트리트 애널리스트들 사이에 자기들이 모르는 한국경제의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는 얘기가 나왔을까. 아마도 몇몇 언론은 그때 재미를 본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분들은 정말로 망국을 원할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에 선거에서 이기려고 북한더러 총을 쏘아 달라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전에는 권력을 잡으려고 전방의 군대를 빼돌려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다. 그 윗대에는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반역행위를 했던 사람들의 역사가 있었다. 지금 경제망국론을 주장하는 언론들은 묘하게도 이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다. 나라가 망해야 자신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이들의 유전자의 힘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경제망국론을 담은 기사들은 진위여부를 떠나 또 하나 고약한 점이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사회 약자를 위한 정책이 국가경제를 망친다는 기조이다. 설령 그 분석이 맞다 하더라도 나는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지지한다. 유흥가 골목길의 간장게장 집을 살리기 위해 온 국민이 밤늦게까지 야근하고 회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자는 정책 때문에 망할 경제라면, 아직도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경제라면, 그 속에서 여전히 ‘재벌 갑질’이 처벌받지 않는 경제라면, 그런 경제는 차라리 망하는 게 낫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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