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계성
논설실장

등록 : 2017.10.09 19:34

[이계성 칼럼] 두 미치광이와 우리의 일상

등록 : 2017.10.09 19:34

한가로운 추석 연휴 찜찜케 한 안보위기

민족 절멸 위협하는 北ㆍ美 기 싸움 탓

일상 유지 속 냉철한 자세로 풀어 가야

비정부기구인 국제핵무기폐기운동(ICAN) 활동가들이 9월 13일 독일 베를린 북한대사관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가면을 쓴 채 모형미사일을 붙잡고 있다. 이 퍼포먼스를 통해 핵무기 폐기를 촉구한 ICAN은 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 가장 긴 휴식이었다. 늘 쫓기듯 했던 찔끔 연휴와는 달리 가족과 함께 영화 보고 외식도 하며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구름 사이로 숨바꼭질 하는 한가위 보름달에 소원을 빌기도 했고 가까운 지인들과 서울 종묘며 남산 자락을 걸었다. 시월의 하늘은 모처럼 미세먼지 없이 푸르렀고, 흰 뭉게구름이 여유롭게 흘러갔다.

그러나 연휴 내내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즐기는 순간에도 늘 묵직하게 뒷목을 당기는 게 있었다. 바로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을 한 순간에 휩쓸어갈지도 모를 한반도 위기상황이다. 서로를 미치광이(mad man)이라고 부르며 미친 짓 경쟁에 여념이 없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추석 연휴 기간에도 주거니 받거니 한반도 전쟁 위기 지수를 한껏 끌어 올렸다.

연휴 시작 즈음 트럼프는 “폭풍 전 고요”라는 말로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더니 며칠 후에는 대북 대화와 협상 무용론을 제기하며 “단 한 가지 수단만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함께 회의를 한 군 수뇌부에게 “여러분이 필요할 때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폭넓은 군사 옵션을 내게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도 했다. 수수께끼 같은 그의 발언을 두고 여러 해석이 분분하지만 군사 공격 쪽으로 한발 더 나아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정은도 지지 않았다. 10일 노동당 창건일을 이틀 앞두고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보고에서 “우리 당이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의 병진노선을 틀어쥐고 주체의 사회주의 한 길을 따라 힘차게 전진하여 온 것이 천만번 옳았다”면서 ‘국가 핵무력 건설의 역사적 대업’의 완수를 외쳤다. 국제사회의 제재 압박이 시시각각 죄어오고 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핵무력 완성을 향해 일로매진 하겠다는 다짐이다.

얼마 전 북한을 방문한 러시아 의원들에게는 “새로운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준비 중”이라는 말도 흘렸다고 한다. 실제로 북한이 노동당 창건일을 전후해 미국 서부해안이나 본토 타격이 가능한 화성 13호 시험 발사를 감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트럼프의 “폭풍 전 고요”나 “단 한가지 수단” 발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엄포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그 동안의 기세에 비춰 볼 때 쉽게 물러설 김정은이 아니다. 연휴 기간 푸른 하늘의 흰 뭉게구름을 즐기면서도 어느 날 그 구름 사이로 무시무시한 미사일이나 포탄들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던 이유다.

일부에서는 언제 우리 머리 위에서 핵폭탄이 터지고, 민족 절멸의 위기가 닥칠지도 모르는데 너무 태평하지 않느냐고 개탄한다. 이번 추석 연휴에 사상 최대 외국여행 인파를 기록하고, 전국의 고속도로가 귀성과 여행객으로 넘쳐났던 것도 도대체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해외 언론들은 무시무시한 전쟁 위기 앞에서 태연한 한국인들의 모습에 의아해 한다. 이런 판에 현 정권이 전 대통령과 전전 대통령 비리를 들춰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는 힐난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 일상은 일상대로 유지될 필요가 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그대로 영위되고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할 일을 해야 한다. 드러난 국기문란 범죄를 눈감고 넘어간다면 나라의 기강이 설 수 없다. 위기를 실감한다 해도 달리 할 일이 많지 않기도 하다. 기껏 생존 배낭 챙기고 주변의 방공호 위치를 확인해 두는 정도일 것이다. 오히려 과도한 위기감과 공포감이 집단적으로 퍼진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설마 전쟁이 일어나기야 하겠느냐는 무사태평주의나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일상의 의연한 유지는 미치광이들이 벌이는 미친 게임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이다. 물론 수십만 수백만 인명을 인질로 삼아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미치광이들에게도 차가운 계산이 있을 터이다.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미치광이들의 차가운 계산에 지혜롭게 다가가는 자세가 아닐까.

논설실장 wkslee@hankookilbo.com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