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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고 느린 삶, 마트엔 없는 믿음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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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하고 느린 삶, 마트엔 없는 믿음 있죠

입력
2015.09.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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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팍한 도시생활 대안문화로

자금자족 장터·벼룩시장 인기 도시농부 88만명… 3년새 6배로, 자립자족 학교까지 등장

유대와 신뢰가 바탕

급변하는 세태에 지친 현대인, 직접 만들고 교환하며 이웃과 공동체의 행복 느껴

19일 '마르쉐@양재'에서 권지연(오른쪽)씨가 시아버지와 함께 추석용 장아찌 선물세트를 팔고 있다. 도시 장터 마르쉐 소비자였던 권씨는 시어머니 손맛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 판매자로 변신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19일 '마르쉐@양재'에서 권지연(오른쪽)씨가 시아버지와 함께 추석용 장아찌 선물세트를 팔고 있다. 도시 장터 마르쉐 소비자였던 권씨는 시어머니 손맛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어 판매자로 변신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1980년대 후반 서구에서 가치와 취향을 함께 하는 소규모 공동체라는 의미로 태동한 도시부족(Urban Tribe)이란 말은 역설적이다. 경쟁과 소비, 향락 이미지와 원시적 노동, 부조와 협력 이미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그런데 근래 우리사회에 그런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팍팍한 도시적 삶에 대한 대안문화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 흐름이 도시농업이다.

경기도 용인의 396.69㎡ 규모 텃밭에서 바질, 열무, 비트 등 각종 채소를 기르는 미국인 그렉 마무네스(44)씨와 한국인 부인은 이웃과 함께 종종 피자, 샌드위치 파티를 연다. 수확물을 나누기 위해서다. 마무네스씨는 이렇게 하고도 남는 유기농 채소를 더 많은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 지난 19일 서울 양재동 시민의숲에서 열린 장터 ‘마르쉐@양재’에 나왔다. 그는 “귀한 무공해 채소가 그냥 버려지는 게 안타까워 마르쉐와 인연을 맺게 됐다”고 말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교류하는 도시 장터인 마르쉐(marche)는 여성환경연대가 기획해 2012년 10월 시작됐다. 마르쉐는 시장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마르쉐에 전치사 at(@)을 붙인 ‘마르쉐@혜화’가 월 1회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열리고 있고, 최근에는 명동, 양재 등으로 확장했다. 장이 열릴 때마다 농부와 요리사, 수공예가 등 50여명의 생산자가 판매자로 나선다. 이들 중에는 좁은 경작지에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하는 도시농부들도 많다.

마침 충북 청주시의 농가 대표 30명이 마르쉐를 방문했다. 시장을 둘러본 현명해(50)씨는 “상업농가가 아닌 소규모 자급자족형 농가가 참여하는 직거래 장터는 흔치 않다”며 “농사 규모를 키우지 않아도 무공해로 지은 농산물을 도시 소비자들과 나눌 수 있는 장터라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마르쉐@양재’가 열린 이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5시간 동안 수백 명이 다녀갔다. 추석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이날 마르쉐는 농산물 판매가 활발했다. 상당수 농부들은 준비한 상품을 판매 종료 시간보다 일찍 모두 팔아 치웠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깔린 신뢰와 유대가 엿보였다. 지난해 10월부터 꾸준히 마르쉐를 찾고 있다는 주부 김미경(36)씨는 장터에 들어서면서부터 판매자들과 익숙하다는 듯 눈인사를 건넸다. 그는 “이곳에서 알게 된 농부들로부터 제철 농산물 패키지 상품인 ‘꾸러미’를 배달 받아 써 보니 만족스러웠다”며 “마르쉐 일정이 공지되면 여기서 파는 농산물을 구입하기 위해 대형마트를 들르는 일도 한동안 미룬다”고 말했다.

도시농부의 급증은 예사롭지 않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3년 기준 88만 5,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0년 15만 3,000명과 비교해 6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생계형이기보다 힐링, 자연주의 등 다른 목적이 많다. 서울 생활 12년째로 결혼한 지 4개월 된 회사원 최성희(31)씨는 텃밭이 있는 양옥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부추, 상추와 토마토, 바질, 라벤더, 로즈마리 등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는 텃밭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자급자족의 충족감과 함께 역시 도시 텃밭을 꾸리시는 시부모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며 “텃밭을 통해 쉴 틈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 생활 속에 지친 심신이 치유되는 경험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 은평구에서 내달 여는 ‘자립자족학교’의 등장도 이런 흐름의 한 반영이다. 도시에서의 전원 마을살이를 꿈꾸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대학으로, ‘자연 재료를 이용한 바구니 짜기’, ‘숲과 들의 재료로 차린 밥상’, ‘짚풀로 만드는 공예’ 등의 커리큘럼으로 짜여 있다.

공동체 삶을 추구하는 도시부족이 도시농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고 장터 정도로 여겨졌던 벼룩시장이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공간으로 주목 받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13년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뒤뜰에서 시작된 ‘세종예술시장 소소’, 2011년부터 서울 영등포 지역 사회적기업의 상품과 서비스 유통 판로를 지원하는 마을 장터로 출발한 ‘달시장’, 서울 이태원 우사단로 계단에서 열리는 ‘계단장’ 등은 대표적인 벼룩시장으로 꼽힌다. 회사원 김선경(39)씨는 아이를 낳고부터 소비과시적 생활방식을 바꿨다. 주변에서 아이 옷을 물려 주는 사람이 많다 보니 소비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해 벼룩시장에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최근에는 서울 마포구청에서 열린 벼룩시장에 나가 사회과학 서적 7권을 팔고 아이에게 줄 영어동화책 10권을 구입했다. 김씨는 “나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지만 취향이 비슷한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벼룩시장에 나간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에는 얼마 전부터 만들기 시작한 에코백을 팔아 볼 생각”이라며 “누구나 손쉽게 생산자가 되기도 하고, 소비자가 되기도 하는 벼룩시장 같은 도시 장터가 좀 더 많아지고 세분화되면 좋겠다”고도 했다.

정기 벼룩시장만 활성화하고 있는 게 아니다.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업계에서는 자신의 소장품 위주로 개별적으로 여는 벼룩시장이 하나의 문화가 됐다. 주로 외국 출장 길에 구입한 물품이 풍부한 패션 스타일리스트 등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일정을 공지하고 여는 경우가 많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준비 과정이 번거로운 벼룩시장을 여는 주된 이유는 작은 공간에서 취향을 공유하는 매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들 도시부족 간의 거래는 유대와 신뢰가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도 큰 특징이다. 회사원 황규란(39)씨는 흠집이 난 ‘못난이 사과’를 종종 구입한다. 지인의 SNS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된 한 과일농원의 상품을 철철이 구입하는 황씨는 “무농약 인증뿐 아니라 농약을 쓰지 않고 농사 짓는 모습을 꾸준히 봐 왔기 때문에 작황이 좋지 않은 해의 과일이나 흠 있는 사과도 무조건 믿고 구입한다”고 말했다.

일련의 도시부족적 경향성은 경쟁사회 피로감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다. 이호 풀뿌리자치연구소 연구위원은 “개인적인 필요나 단순 호기심 등 도시농업이나 직거래 장터를 찾는 구체적인 이유는 다양하지만 결국 상호부조적 관계망 속에서 대안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며 “파편화하고 끊임없이 부딪쳐야 하는 도시적 삶의 스트레스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말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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