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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음식의 기품과 성의를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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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 음식의 기품과 성의를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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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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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이 요리하고 스타일링한 여름 밥상. 산초와 감 장아찌(왼쪽 위 작은 종지), 자두소스와 된장 육수를 곁들인 민어 구이(파란 접시), 쑥갓, 쑥갓꽃, 한련화 잎을 올리고 김칫물 소스를 얹은 수란(오른쪽 아래 종지), 찔레순, 돼지감자와 초석잠, 산도라지, 어린 마늘, 엄나무순, 목이버섯 장아찌(검은 접시), 백미, 흑미, 조, 수수를 층층이 쌓은 밥에 망고 장아찌와 어린잎 채소, 3년 된 토하젓을 곁들인 것(작은 소반 위)과 함께 곁들여 먹는 육포 고추장과 참기름(작은 종지 두 개).
이종국이 요리하고 스타일링한 여름 밥상. 산초와 감 장아찌(왼쪽 위 작은 종지), 자두소스와 된장 육수를 곁들인 민어 구이(파란 접시), 쑥갓, 쑥갓꽃, 한련화 잎을 올리고 김칫물 소스를 얹은 수란(오른쪽 아래 종지), 찔레순, 돼지감자와 초석잠, 산도라지, 어린 마늘, 엄나무순, 목이버섯 장아찌(검은 접시), 백미, 흑미, 조, 수수를 층층이 쌓은 밥에 망고 장아찌와 어린잎 채소, 3년 된 토하젓을 곁들인 것(작은 소반 위)과 함께 곁들여 먹는 육포 고추장과 참기름(작은 종지 두 개).

밥 한 상. 음식은 제각각 지닌 맛을 선명히 내면서도 할퀴거나 들이치지 않아 편안했다. 요리연구가 이종국이 “밥 때 왔으니까”라며 한사코 내준 ‘집밥’ 상에 놓인 것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여름 생선을 푹 고아낸 탕 한 그릇에 몇 가지 장아찌와 젓갈, 김치가 전부였다. 다만 수저를 내려 놓을 때의 꽉 찬 마음은 수라상을 대접받은 것 같았다.

어제 배불리 잘 먹은 제육 백반이 자꾸만 서러워지는 게 왜일까 의아해졌을 때, 문득 오래된 기억이 툭 튀어 나왔다. 어느 여름방학, 외할머니의 툇마루에서 받았던 간출한 밥상. 애지중지 말린 생선을 지지고 장독에서 꺼낸 차가운 김치를 송송 썰어 차린, 그 시시한 밥상을 퉁명스레 받아 먹다 보면 어느새 밥 한 공기가 싹 비어져 있곤 했다. 그 맛에 사계절의 성의가 다 담겨 있어서였다. 집집마다 봄에는 장을 담그고, 겨울이면 김치를 묻던 시절 모두의 밥상이 다 그랬듯이.

요리연구가, 혹은 요리사 이종국의 이름은 성북동 폐쇄적인 산자락 아래에는 실상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미술을 전공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그리고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요리사로 활동했던 전력조차 그를 설명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2014년 웨스틴 조선호텔 서울이 100주년을 기념해 갈라디너를 열었을 때 초대된 요리사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고, 내년 처음 운영되는 포시즌스 호텔 체인의 호화로운 세계 일주 미식 투어에서 서울의 파인다이닝을 대표할 요리사 역시 그라는 점이 차라리 이종국이라는 존재감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쉬운 설명이 될 것이다.

성북동 골짜기에 파묻힌 이종국의 작업실은 ‘음식발전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성북동은 여전히 ‘고관대작’이라는 단어가 유효한 곳이다. 장독이 놓인 푸른 정원과 현대적인 조형물, 유려한 도기와 요염한 소반이 공간을 은은히 채운 음식발전소는 현대의 고관대작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는 프라이빗 다이닝이자 쿠킹 클래스다.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어왔던 상류층의 밀실이요, 별세계라 할 수 있다. 세계적인 명사들 또한 한국에 올 때면 어김 없이 그의 프라이빗 다이닝을 경험하고 간다. 그 중 요리사들, 그러니까 미쉐린 3스타 혹은 그에 준하는 명성을 가진 푸른 눈 요리사들은 음식발전소의 음식을 맛 보는 동안 그들이 알았던 한식에 대한 배신감을 이야기하곤 한다. 이종국이 보여주는 한식은 세계에 만연한 어떤 한식과도 다른, 생경한 결의 한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의 어떠한 요리보다도 요요한 멋을 뽐내며, 동시에 가장 소박하고 원초적인 성의를 담고 있다. 그렇다 해서 그의 음식이나 철학이 동시대의 대중과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 그의 요리는 부지불식간에 밖으로 스며 나와 젊은 한식 요리사들과 요식업 기업의 신규 전략 등 세간의 음식 문화에 영향을 끼쳐왔으며, 잊었거나 잊혔던 우리 식재료와 조리법을 발굴하고 보존하며 그 맛과 본모습을 되레 새롭게 드러냈다. 그러므로 그의 음식은 이 시대 누구에게나 밀착된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진다.

혀를 농락하는 맛, 실없이 배만 부풀리는 양, 저렴한 것만이 미덕인 값에 시달리는 것이 우리 식문화의 새 주소가 된 지 오래다. 악다구니 같은 생활의 피로, 그리고 효율이라는 기만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동안에 마음과 정성을 다한 질 좋은 음식은 어느덧 오래된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울적한 질문이 남았다.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무엇을 먹이며 살아가는가?

음식발전소 거실 한쪽 벽면의 소반 컬렉션 옆에 선 요리사 이종국. 네 번에 걸쳐 만난 그는 어느 날은 고뇌하는 장인 같았고, 어느 날은 들판의 소년 같았으며, 또 어느 날은 엄숙한 신사, 그리고 즉흥적인 예술가 같았다.
음식발전소 거실 한쪽 벽면의 소반 컬렉션 옆에 선 요리사 이종국. 네 번에 걸쳐 만난 그는 어느 날은 고뇌하는 장인 같았고, 어느 날은 들판의 소년 같았으며, 또 어느 날은 엄숙한 신사, 그리고 즉흥적인 예술가 같았다.

-다양한 일들을 했다. 그 중 왜 요리인가.

“좋아서다. 좋은 만큼 음식을 앞에 둘 때마다 불안하기도 하다. 항상 부끄럽다. 나의 자만이나 고정관념 때문에 간을 허투루 할까 봐 제자들에게 참 많이 묻는다. “오늘의 간은 어때?” 하고.”

-세상에 산해진미가 많다. 왜 한식인가.

“한국 사람이니까. 이 땅에 살아온 내가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받은 유전자니까.”

-한식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서양 음식이 더 아름다운 형태미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식 역시 그럴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식은 서양에 없는 아름답고 과학적인 조리법을 갖고 있다. 길게 빠지는 여운을 자아낸다.”

-그걸 어디서 배웠나.

“어머니의 항아리다. 나는 막내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일찍부터 아이들을 홀로 키우셨다. 밤마다 제철의 재료를 손질해 항아리마다 갈무리해두던 어머니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돌아가신 후 그 항아리를 열어봤을 때 당신의 고독한 삶을 채우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철이 지나서도 그 재료를 꺼내 먹을 수 있는 한식의 보존법이 그 생활 면면에 녹아 있었다.”

-흔히 한식이 차별되는 근간을 발효에 둔다.

“발효만이 핵심은 아니다. 한 꺼풀 더 들어가 보면 거기엔 마음이 있다. 발효, 건조 등 보존을 통해 그 철의 재료를 때가 지나서, 우리 몸에 필요할 때 공급하기 위한 배려가 녹아 있다. 엄동설한에 파낸 김치, 여름에 마침맞게 익은 봄나물 장아찌가 얼마나 반갑나. 겨울에 딸기가 나고 4월부터 수박을 먹는 이 편리한 시대가 망각하고 있는 정서다. 음식엔 정성과 배려, 사랑이 담겨야 하는데 요즘 식문화에는 그게 결여돼 있다.”

-정성과 배려, 사랑, 성의와 같은 단어들은 이종국의 음식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상류층의 식문화가 모든 계층에 전파됐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앞에서 뒤로 흐른다. 한국에도 사대부의 미소와 기품, 철학과 인식이 담겨 마음을 전달하는 고유의 파인다이닝이 존재한다는 걸 알리고 싶다. 단, 내가 잇는 것은 전통 그 자체가 아니다. 그 마음을 이을 뿐이다. 전통을 근거로 동시대에 맞는 발전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옛 것의 좋은 점을 발췌해서 후대에 남기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옛 것이 되레 새롭게 느껴지는 때다.”

-한국의 식문화는 발전기에 들어섰다. 그에 따라 설탕, 소금 등 다양한 화두를 통해 음식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는 분위기다.

“이제까지 한국 식문화는 모든 게 과도했다. 설탕이 나쁜 게 아니고 소금이 나쁜 게 아니다. 과한 것이 문제일 뿐이다. 한식에는 지혜가 있다. 법제(法製)다. 인간에게 해로운 자연의 물성을 다스리는 법을 한식은 이미 다 알고 있다. 단맛은 천연재료로 보충할 수 있고 짠맛은 초(醋)로 누를 수 있다. 그 지혜를 잊으니 이제 음식이 다 급하고 극단적이다. 가치보다 효율이 앞서는 시대다. 그에 대한 반작용이 일어난 것이라 본다. 점차 식문화 발전이 이어질 것이다.”

음식발전소 주방 한 켠 냉장 창고의 한 벽면. 때마다 갈무리한 온갖 장과 소스, 장아찌, 식재료 등이 빼곡하게 차있다. 새로운 제자가 오면 23개의 냉장고와 여남은 개의 장독 어디에 무엇이 있는 지를 외우는 것부터가 일이다.
음식발전소 주방 한 켠 냉장 창고의 한 벽면. 때마다 갈무리한 온갖 장과 소스, 장아찌, 식재료 등이 빼곡하게 차있다. 새로운 제자가 오면 23개의 냉장고와 여남은 개의 장독 어디에 무엇이 있는 지를 외우는 것부터가 일이다.

-음식발전소는 한정된 계층이 향유하는 식문화 안에 있다. 여의도 전경련회관 파인다이닝 식당 ‘곳간 by 이종국’ 역시 고가다.

“음식의 가치는 가격만으로 판단할 수 없지만, 그 음식이 가격에 합당한 값어치를 하는가는 중요하다. 식재료의 질부터 조리의 수준은 물론 접객 태도와 자리 배치, 스타일링, 인테리어 디자인, 음악이나 공기, 온도 하나하나까지가 모두 음식의 값어치를 이루는 요소다. 또한 음식발전소는 음식을 만들어 파는 식당 이상의 의미다. 우리 식재료를 찾아내고 복원하고 지키는 연구, 관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야생 산더덕, 손가락 한 마디만한 찔레 순 등 전국에서 나는 귀한 재료를 그때그때 모아 사용하거나 보존식으로 묵힌다. 간장도 해마다 다르기에 30년, 50년 묵힌 것이 있다. 나와 제자들이 1년 내내 관리하는 냉장고만 23개다. 장독도 여남은 개를 두고 있다. 음식에 쓰이는 시간, 정성의 값어치다.”

-음식발전소 밖으로 나와 대중 시장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이 시대 식문화에는 꼭 마지못해 주는 것처럼, 먹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참한 기분까지 느끼게 하는 음식이 많다. 식문화 개선에 기여할 방법을 찾으려 한다. 학교나 군대의 급식, 노인식, 혹은 사회문제로까지 거론되는 소아비만 아이들을 위한 음식 등 할 일이 많을 것이다. 나 혼자 힘으로 될 일은 아니다. 관계기관이나 기업 등 뜻을 함께 할 조직도 필요하다.”

-사회적 사명감 외에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화중지병(畵中之餠), 곧 그림의 떡은 먹을 수 없고 향을 느낄 수 없다. 그럼에도 그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할 수 있다. 그림 속 음식으로도 감흥이 전달되는 것이다. 한국 식문화의 아름다움을 조형적으로 담는 작업을 얼마 전 시작했다. 올 연말 한국이 아닌 영국에서 발간할 예정이다. 우선은 외국에 한식을 잘 알리고 싶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Afro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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