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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도라에몽은 울지 않는다

입력
2016.04.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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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가족들이 도라에몽 등 인형탈을 쓰고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후보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 유경근 세월호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트위터
세월호 유가족들이 도라에몽 등 인형탈을 쓰고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후보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 유경근 세월호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트위터

희망은 우리 시대 가장 더럽혀진 단어다. 이 세계에 적합한 단어는 희망이 아니라 가망이며, 알다시피 가망은 부정태와 더 잘 어울리는 단어다. 가망 없는 세계: 헬조선.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희망 없이 자살한 작가 로맹 가리는 썼다. 더 이상 절망적일 수 없는 순간에도 불쑥 튀어나오려는, 이 망할 놈의 희망. 하지만 끝없는 희망고문에 지쳐버렸다. 꿈쩍 않는 지옥을 두고 희망을 말하는 자, 모두 거짓말쟁이. 희망은 발아하지도, 발굴되지도 않고, 그저 날조될 뿐 아닌가.

세월호의 엄마, 아빠들이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국회로 보내기 위해 도라에몽 등의 인형탈을 쓰고 선거운동 하는 사진이 선거 후 공개됐다. ‘헬조선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이라고 적힌 피켓 앞에서 도라에몽이 춤을 춘다. 혹여 표를 잃을까,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사실도 알리지 않고,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온몸이 땀에 젖도록 길거리에 서서 춤을 춘다. 우리가 서늘하게 희망을 경멸할 때, 세월호의 부모들이 희망을 말하는 통탄할 역설. 낙선할 경우 세월호의 운동 에너지가 꺾일 수 있다며 출마를 고민하던 박 당선자에게 세월호의 부모들은 말했다. “괜찮다. 우리는 맨날 지는 사람들인데….” ‘맨날 지는 사람들’이 도라에몽이 되어 흘린 것은 땀이었을까, 눈물이었을까. 그리스 비극의 파토스마저 남루해지는 도라에몽의 춤 앞에서 감히 희망을 모욕한 내 죄를 벌한다.

역대급 서스펜스를 안겨준 제20대 총선 결과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본능을 자극했다. “헬조선에는 괴물들만 사는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다”며 착한 후배가 배시시 웃는 아침. 하지만 섣부른 희망 대신 환멸의 습격에 대비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뒤늦게 개인 자격으로 세월호 2주기 추모에 나선 김종인 더민주 대표는 “불필요한 정치적 공방을 우려해 당 차원의 추모는 없다”는 비정한 전언으로 이미 환멸의 포문을 열었다. 희망을 발설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결조건이 세월호라는 것을 정치공학자들은 모른다. 세월호를 저대로 놔두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세월호가 종북이고 좌파라는 주장은 돈 받고 시위한 혐의를 받는 목소리 큰 소수의 주장일 뿐, 침묵하는 바닥민심이 아니다. 게다가 세월호는 이 국가에 산적한 과제 중 가장 쉬운 과제다. 일자리 창출, 임금불평등 해소, 청년주거와 노인빈곤 문제는 열심히 해도 풀기 어렵지만, 세월호는 결단만 하면 얼마든지 풀 수 있는 문제다. 간결하고 명쾌하기 때문이다. 사월의 봄날, 깔깔대며 벚꽃을 보러 떠난 아이들이 300명이나 물 속에 잠겼고, 그 까닭을 밝혀내 다시는 그런 참혹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공방 가능한 논제인가.

강원 원주·횡성 시민 416명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합창을 하고 있는 모습. 원주=연합뉴스
강원 원주·횡성 시민 416명이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합창을 하고 있는 모습. 원주=연합뉴스

세월호 이후, 나는 이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이 나라가 솔직히 너무 두렵다. ‘어떻게 그런 일이…’가 범상하게 일어나는 곳. 대기업 마트가 만들어 판 가습기 살균제로 200명 넘는 아이와 어른이 목숨을 잃어도 벌 받는 자가 없다. 세월호 구조 실패의 책임자가 또 다시 금배지를 달고 여당 대표를 하겠다고 나선다. 새끼를 지켜주는 것이 존재의 사명인 엄마에게 이곳은 도무지 생존 가능한 서식지가 아니다.

희망의 크기는 작고, 환멸의 크기는 거대하다는 데 생의 비극이 있다. 1㎜의 크기로만 오는 희망. 하지만 희망을 결정하는 것은 크기가 아니라 방향이다. 희망의 나라로 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세월호를 향해 뱃머리를 돌리는 것. 세월호가 우리의 가난과 곤궁을 해결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를 거치지 않고는 국가와 나의 신뢰 계약을 갱신할 수 없다. 진실이 이길 수도 있다는 경험, 1㎜의 희망이라도 흩날리지 않고 모아지는 기적. 그것이 가능한 최적의 장소가 세월호다.

도라에몽은 그저 울고 있지 않았다. 희망이라는 더럽혀진 단어는 춤추는 도라에몽 덕분에 마침내 구원됐다. 이제는 우리가 도라에몽에게 답할 차례다. 20대 국회는 세월호특별법 개정안부터 처리하라.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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