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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 환자의 마지막 투표

입력
2017.05.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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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선거날 평범한 심정지 할아버지 한 명이 응급실로 들어왔다. 흉부를 누르는 심폐소생술로 급박한 카트 뒤에는 담담하고 침착해 보이는 그의 아들이 따라왔다. 의료진은 환자가 도착하자마자 재차 심정지를 확인하고, 소생실로 옮겨 심폐소생술을 유지했다. 할아버지의 심장은 정확히 6분 만에 돌아왔다. 하지만 맥이 매우 약했다.

나는 소생실을 나와 환자의 아들과 급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워낙 건강이 안 좋았지만 거동은 가능하셨다고 했다. 오늘 아침 일찍 투표까지 하고 오셨는데 그 뒤로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셨다. 점차 흉통이 심해지자 아들은 아버지를 병원에 데리고 가기 위해 옷을 갈아 입히려 했고, 아버지는 외출복을 반쯤 입은 상태로 아들의 눈앞에서 쓰러졌다. 119가 도착하자 심정지였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확히 34분이 지났다.

“지금 일단 심장이 돌아오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났고 전반적인 상태도 너무 안 좋으십니다. 돌아가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직접 가서 투표까지 하셨는데, 이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저희가 최선을 다 하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아들은 조용히 대답했다.

소생실로 돌아가자 할아버지의 심장이 다시 멎어 있었다. 몇 개의 손이 할아버지의 흉부를 번갈아 누르고 있었다. 돌아올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이대로 죽는다면,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투표가 된다. 그러니 나는 아침에 투표장에 나가서 투표를 하고 저녁때 죽는 삶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 그가 남긴 한 표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유언 한 마디 남길 여유 없이 급사한 그에게 그 표는 유서 같은 존재이겠지만, 결국 무기명의 종이 한 장으로 남을 것이다. 한 인생이 이 세상에서 종말을 고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일이 몇 천만 표에다 고작 한 표를 더하는 일이어도 괜찮은 것일까. 그것을 인생의 무게와 저울질한다면, 결국 무의미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만약 오늘이 투표날이고, 나는 내가 저녁때 죽을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아침에 투표를 안 하고 다른 일을 해야 내 죽음을 특별한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도 당장 특별한 삶을 살 수 없으며, 일상은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한다. 내가 저녁때 죽더라도 남들과 같이 아침과 점심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당장 투표날 투표라는 권리를 행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사람은 각기 자신에게 의미 있는 행위를 하며 지금을 사는 것이고, 그에게 투표는 그 의미에 상응하는 행위였을 뿐이다. 그는 오히려 마지막까지 주어진 권리를 누렸던 사람이다. 다만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오늘이 되었으므로, 그 표는 유난히 특별한 한 표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지나치게 슬퍼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생각이 끝날 때까지 그의 심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내 말을 전해 듣고도 울지 않았다. 곧 사체는 하얀 포가 덮여 장례식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두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에서, 내가 동정할 수 있는 삶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다 남들처럼 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한 표, 괜히 목숨과도 바꾼 듯한 한 표, 그리고 그가 자신이 곧 죽을지도 모르고 떨리는 손으로 투표함에 표를 넣는 가슴 찡한 장면...

이윽고 사체를 실은 카트는 응급실을 영영 떠나버렸지만, 나는 그 한 표가 투표함 안에서 괜스레 빛나는 광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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