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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TK의 대부’ 신현확에 대한 엇갈린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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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TK의 대부’ 신현확에 대한 엇갈린 평가

입력
2017.09.2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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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신현확 전 총리.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8년 광주청문회에서 증언하는 신현확 전 총리.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현확은 ‘영원한 TK(대구ㆍ경북)의 대부’라 불린다. 1920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그는 경성제대를 거쳐 일제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다. 당시 일제 고등문관 합격자는 그 수가 무척 드물었을 뿐 아니라, 합격해도 대개 조선에서 군수로 근무했다. 2차 대전 말 내선일체 분위기 속에서 신현확은 이례적으로 일본 상무성 본청으로 발령났다. 후에 이런 경력은 친일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신현확은 광복 뒤 이승만 정부에서 경제관료로 출세를 거듭, 서른아홉의 나이로 부흥부장관직에 오른다. 제일제당, 제일모직 사업에 도움을 주면서 이병철 삼성 회장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신현확이 1987년 이 회장 타계 후 삼성그룹에서 후계자인 이건희 회장을 위한 바람막이 역할을 한 것도 이 회장의 평소 유지를 따른 것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조직도, 자금도, 인력도 없던 상황에서 해방 후 경제 발전에 온 몸을 던졌고, 박정희 정권 말기 무리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비판하고 안정화 정책을 추진한 것은 경제관료로서의 치적으로 꼽힌다. 1980년 봄 상황에서도 신군부와 일정 정도 거리를 두고 민정 이양을 추진하려 하려 했다는 점은 평가 받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두환 군사정권의 집권을 막지 못한 데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당시 국무총리로서 권한을 행사했음에도 군사정권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데 대해서는 책임윤리 관점에서 어떤 식으로든 면죄부를 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승만ㆍ박정희 정권 고위 관료였고 신군부와 일정 정도 관계를 맺었으니 개발독재에 일조한 것 아니냐, 평생 양지만 쫓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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