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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이성적으로 합시다

입력
2016.09.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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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넉넉한 추석 연휴를 즐기는 동안에도 전 세계에서는 북한 정권의 핵 개발 관련 뉴스와 분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연휴 기간 관련 보도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북한 정권이 5차 핵실험을 실시하기 불과 5일 전에 유엔대표부를 통해 함북지역의 수해 현황을 설명하며 긴급지원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미국 대북지원단체에 발송했다는 소식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특히 북한이 핵 개발을 위해 투입한 돈이 무려 15억달러(약 1조7,000억원)나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돈의 10분의 1만 민생에 투입해도 국제적 구걸은 피할 수 있을 것이란 분노를 참을 수 없다. “권력 유지를 위해 국제사회와 주변국의 어떠한 이야기도 듣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정신사태는 통제 불능”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진단이 일견 타당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어버이연합 소속회원들이 10일 오후 서울 광화문 KT빌딩 앞에서 북한 핵실험을 규탄하며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화형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버이연합 소속회원들이 10일 오후 서울 광화문 KT빌딩 앞에서 북한 핵실험을 규탄하며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화형식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미국 뉴욕타임스는 박근혜 대통령이 ‘통제 불능’ 언급 직후 ‘북한은 미치기는커녕 너무 이성적’이란 제목의 분석기사를 실었다. 한마디로 북한 정권은 호전적이며 예측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적들에게 심어줌으로써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려는 잘 계산된 행동을 일관되게 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또 미국의 이라크 리비아 침공을 보면서 북한 정권은 미군 기지와 남한을 선제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줘야만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를 위해 필사적으로 핵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북한의 이런 전략을 “힘이 약한 국가가 강대국을 적으로 마주했을 때 평화를 이루기 위한 이성적 방법”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박 대통령과 뉴욕타임스의 시각이 왜 이렇게 다를까. 둘이 이성 즉 합리성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지적하는 ‘김정은의 통제 불능’은 막스 베버가 분류한 목적합리성과 가치합리성 중 가치합리성에 기반을 둔 해석이라 할 수 있다. 핵 도발을 하면 한반도 전체가 괴멸하는 상황에서, 기아와 자연재해로 목숨부지도 못하는 주민들을 볼모 삼아 핵 개발을 고집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비이성적이고 따라서 통제 불능이다. 반면 옳든 그르든 어떤 목적이 주어진다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과 그에 따른 결과를 종합 고려해 전략을 선택하는 행위는 목적 합리적 행위다. 김정은과 북한 정권의 행동은 이 목적합리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대응도 가능하다.

북한 정권이 핵무기를 체제유지의 유일한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한반도에서 핵 위험을 제거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우선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인데 우리 정부 일각에서 흘리고 있는 ‘레짐 체인지’가 그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가능한지 따지기 이전에 북한 내의 정권 교체를 기대하고 있다면, 이런 말을 흘리는 것부터가 그 가능성의 싹을 짓밟는 우매한 행동이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들의 대북정책 실패를 호도하려는 얄팍한 술수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지금, 가장 근본적 해결책은 역시 북한 정권이 ‘핵무기 없이도 체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결국 상호신뢰할 만한 ‘비핵화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 대가로 북한이 원하는 평화협정 체제 전환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은 불필요하게 북한 정권을 자극하는 언동을 삼가는 것이다.

사회생물학 창시자 에드워드 윌슨 전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지구의 정복자’에서 오늘날의 세계를 “석기시대의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 중세의 제도 속에 살면서 신과 같은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머리에 핵무기를 얹고 살아가는 한반도의 위태로움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요약하기 힘들다. 남북 누군가 자칫 이성을 잃으면 순식간에 석기시대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정영오 여론독자부장 young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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