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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친구와 친구 사이

입력
2016.12.2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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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역시 친구 사이였을 게다.

뻣뻣하게 고개를 든 채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외면하지만 분명히 얼마 전까지는 ‘친구 먹고’ 지내며 나랏돈으로 온갖 특혜를 밥 먹듯이 나눠 먹었을 그들이다. 얼굴도 진즉 마주했을 것이고 하다못해 전화통화든 서신이든 친구끼리 주고받을 만한 모든 대면의 자리를 통해 서로 부정한 이득을 취득하고 나누길 반복했을 그들이다. 하늘 높을 줄 모르던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서로 웃거나 부른 배를 매만지면서 못난 ‘개, 돼지’들의 아우성쯤 좁쌀보다도 못하게 여겼을 바로 그들도 자기들끼리는 친구 사이였을 것이다.

탐욕의 꿀맛을 잊지 못한 것일까. 서로 모르거나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하는 그들의 눈빛은 어느새 이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겠다는 의지로 핏발만 가득 서려 있다. 안하무인에 점입가경의 형국이 현실을 달군다.

이른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촛불 정국으로 불타오르는 요즘, TV 화면을 보다가 나도 몰래 방바닥을 뜯느라 손톱이 빠질 지경이다. 그러다 문득 옛친구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친구의 이름은 ‘카심’. 장소는 미군의 폭격이 있기 이틀 전인 지난 2003년 3월 18일 저녁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의 한 거리였다. 현지에 남기로 한 나는 한국에서 같이 왔다가 그날 밤 요르단 암만으로 철수하는 반전평화팀을 배웅하는 자리에 나갔었다. 폭격이 곧 임박한 상황이었기에 무척이나 마음이 심란했다. 그때 우리 일행의 현지 가이드였던 카심이 잠시 얘기를 나누자며 먼저 말을 걸었다. 불과 2, 3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린 꽤 친해진 사이였다. 대여섯 살 손위였던 카심은 평소와는 다른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친구로서 존중해줄 수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이미 그의 따뜻한 성품과 친절에 매료되어 있던 나는 당연히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린 친구이니 내 부탁을 꼭 들어주게나. 지금 나를 위해 이 버스를 타고 이라크를 떠나주게. 지금 떠난다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이대로 남는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네.”

그는 나의 안전을 염려하고 있었다. 폭격이 시작되면 혹시나 내가 화를 입게 될까 하는 마음에 진심을 다해 당장 떠나주기를 원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울컥하는 감정에 눈물이 솟구쳤고 그대로 카심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 멋지게 기른 턱수염에 희끗거리는 반백의 머릿결이 잘 어울리던 카심은 마치 아버지처럼 사려 깊게 내 감정을 살펴주었다. 평소에도 늘 웃는 얼굴이었고 사진전송 등 부탁하는 모든 것에 항상 “노 프로브렘”이라 답을 하던 그였다.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된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친구 사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연락이 끊긴 지금 이라크에서 들려오는 여러 사고 소식을 접할 때마다 그의 안위가 무척이나 염려스럽다. 이라크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카심은 누구 못지않게 모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한국 반전평화팀의 평화를 염원하는 현지활동을 도우면서도 글을 쓰거나 읽지 못하는 거리의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손바닥에 직접 ‘PEACE’라는 글자를 써서 보여주던 감동적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TV 화면 속 그들의 오만함을 보면서 이제 아득한 기억이 된 먼 나라 옛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다니 공연히 황망하다. 서로 끈끈하게 이어진 관계로 온갖 사적 이익과 권력만을 탐하다가 이제야 서로를 모르거나 부정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자니 공연히 부아가 치솟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신의 없이 자신 개인의 영달과 탐욕을 근거로 맺은 인연들이니 오죽하겠는가마는 진실은 가라앉지 않을 터, 관심 거둘 일 없이 계속 TV 화면을 볼 생각을 하니 당분간 방바닥 긁을 일이 늘어날까 봐 조금은 염려스럽다.

더불어 옛친구 카심이 오늘따라 유난스럽게 그립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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