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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원근법] 미세먼지, 옥시 사태, 위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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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원근법] 미세먼지, 옥시 사태, 위험사회

입력
2016.05.1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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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서 옥시제품 판매 즉각 철수를 촉구하며 매대의 옥시제품들을 빼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15일 오전 서울 롯데마트 서울역점에서 옥시제품 판매 즉각 철수를 촉구하며 매대의 옥시제품들을 빼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아침에 일어나 대기가 맑지 않으면 많은 이들은 포털 사이트에 미세먼지를 입력해 농도를 체크한다. ‘좋음·보통·나쁨·매우 나쁨’으로 나오는 정보를 보면서 이 기준을 과연 믿어도 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농도는 ‘보통’이라는데 상태가 ‘나쁨’인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권고한 미세먼지 환경기준은 연평균 20㎍/㎥, 하루 평균 50㎍/㎥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준치는 연평균 50㎍/㎥, 하루 평균 100㎍/㎥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미세먼지 농도 80㎍/㎥까지를 ‘보통’이라고 보지만, 대다수 나라에서 이 정도 수준은 보통이 아니라 ‘나쁨’에 속한다. 정부 관계자 역시 국민 건강을 위해 기준치를 더 높여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정부가 제공하는 기준치에 대해 큰 신뢰가 가질 않는다.

기준치는 그렇다고 치고, 문제를 좀 더 깊게 보면, 조사 결과 수치들은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인지의 의문도 떠오른다. 실생활에 연관된 정보는 일반적으로 전문가가 생산한 전문 지식에 따른다. 전문 지식은 사회적 토론 및 합의를 거치지 않은 전문가의 연구 결과와 이에 기초한 가치 판단에 대한 신뢰를 전제한 지식이다. 이 가치 판단은 정말 전문가의 윤리와 양심을 담고 있는 걸까.

전문가 사회의 명암을 주목한 대표적인 사상가는 위르겐 하버마스다. 과학기술을 포함한 지식의 발전은 일반 시민들이 통제하기 어렵다. 따라서 많은 이슈들은 전문가의 최종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의 복합성 증대를 고려할 때 전문가 사회의 경향이 점점 더 강화되는 것은 사실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삶의 많은 결정에 대해 지식을 독점한 전문가들에게만 맡기는 것은 결국 시민사회 자율성의 빈곤과 쇠퇴를 초래한다. 하버마스는 이를 ‘생활세계의 식민화’라고 부른 바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내가 미세먼지 문제만을 얘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지난 7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과 연관된 연구보고서를 작성한 조 모 교수가 구속됐다. 조 교수는 옥시와 옥시 측 법률대리인 김앤장이 자신이 제출한 보고서에서 유리한 부분만 발췌해 내용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옥시로부터 제품이 폐 손상과 연관 없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실험을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진실은 이제 법정에서 가려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은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 비윤리적인 기업과 무능한 정부가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할 사건이다. 동시에 전문가 사회의 그늘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자연과학자들은 물론 나를 포함한 사회과학자들은 삶과 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지식을 제공하지만, 이 지식의 과학적 타당성에 대해선 합리적 의심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른바 ‘청부 과학’이라 불리는 권력·자본과 과학 간의 비윤리적 유착에 대한 시민사회 및 공론장의 감시 또한 강화돼야 한다.

오늘날 분명한 것은,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risk society)’의 그늘이 과학기술에의 의존이 강화되면 될수록 더욱 두드러지고, 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사회의 감시와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이 안겨주는 교훈의 하나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도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적 참여를 보장하는 ‘기술적 시민권’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데 있다. 과학기술이 사회 문제들과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철저히 가치중립적이거나 비정치적인 영역이 아니라는 시민적 계몽의 중요성이 21세기 위험 사회에선 갈수록 커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대학에서의 연구자 윤리와 양심에 대한 교육 또한 중요하다. 사실을 발견하고 이에 기초한 가치 판단을 다루는 전문 연구자에게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윤리는 ‘신념 윤리’다. 신념 윤리란 옳고 그름의 윤리다. 그른 것을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진리의 정신에 위배된다. 권력·자본과 구별되고, 때론 맞서야 하는 진리의 정신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대학의 사명이다.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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