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케이션 확산 이유는 법적으로 유급휴가 보장 않는 美
출근 안 하고 일하는 일상탈출 선호… 새로운 휴가의 대안 vs 양극화 확대
지난해 미국에서는 아주 이상한 통계가 발표됐다. 미국여행협회가 내놓은 자료였는데, 최근 10여년간 미국 근로자들의 휴가 일수가 크게 줄었다는 내용이었다. 2000년 연간 20.9일이던 평균 휴가 일수가 2013년에는 16일로 5일 가까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일시적 대량 실업사태를 감안해도 이런 통계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여름 휴가철 성수기마다 항공료와 숙박요금이 치솟고, 주요 휴양지마다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는 걸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이 수수께끼에 해답을 제공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그 통계대로 ‘휴가일수는 줄었으나, 휴가지에 간 근로자는 늘었다’며 화이트컬러 근로자 사이에서 새로 등장한 ‘워케이션’(Workation) 행태를 소개했다. 과거처럼 휴가지로 가족과 함께 떠나지만,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을 뿐 공식적으로는 그 기간 중 일을 하는 방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얘기다. 공식 통계는 아니지만, 휴가지로 떠난 미국 직장인 가운데 20~25% 가량이 근무 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 신문에 따르면 미국 워싱턴시의 통신관계협회 최고경영자(CEO)인 셜리 블룸필드는 지난 봄 동부 델라웨어 해변의 한 별장에서 남편과 행복한 일주일을 보냈다. 부부는 자식처럼 아끼는 골든리트리버 혈통의 애견 ‘캐시’를 데리고 바닷가를 산책했다. 날이 쌀쌀해지면 벽난로에서 마시멜로우를 구워 먹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 근무표에는 블룸필드가 ‘출근’한 것으로 표시됐다. 복잡한 워싱턴시 일상을 떠나기는 했으나, 필요할 때마다 컴퓨터와 화상통신 장치를 통해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고객과 부하 직원과 연결해 업무를 처리했던 것이다.
마이애미 CBS방송도 비슷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바네사 에드워즈가 남편과 여행을 떠나기로 했을 때 회사 일까지 두고 온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에드워즈는 “몸은 휴가지에 있지만 우리 사무실을 컴퓨터와 인터넷 화상전화, 그리고 휴대폰에 담아왔다. 100% 회사 근무도 아니고, 완전한 휴가도 아니지만 이런 방식의 일상 탈출이 대세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헤드헌터 업체인 ‘더 뮤즈’의 편집장 에이드리언 그란젤라 라르센 역시 최근 2년간 남편과 함께 도미니카 공화국과 푸에르토리코에서 각각 일주일 간의 워케이션을 보냈다. 일손이 부족한 신생 업체에서 근무하는 만큼 1주일이나 업무를 접고 휴가를 내는 것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워케이션을 선택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라르센이 휴가지 숙소를 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안정적으로 와이파이가 제공되는지 이었다. 이를 통해 여름 휴양지에서도 이메일을 계속 확인하고 자신의 업무를 이어갈 수 있었다. 물론 회사 사무실에 있었다면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했을 즉석 회의를 피할 수 있었다. 그는 “해변에 발은 담그고 있었지만, 업무에 완전히 접속돼 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워케이션이 미국 직장인들의 새로운 여름 나기로 확산되면서 휴양시설 업체도 재빨리 변신하고 있다. 워케이션 고객이 주로 찾는 캘리포니아주 타호 호수나 카나리아 제도 같은 휴가지에는 곳곳에 고성능 통신망과 다수의 작은 사무용 공간이 마련됐다. 과거에는 회사 일을 잊고 푹 쉬도록 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제는 수백 혹은 수천㎞ 떨어진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한 채 업무 처리가 가능한 체제도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타호 마운틴 랩의 제이미 오르 사장은 “우리 시설을 찾는 고객 중 25% 정도가 스키를 타거나 하이킹을 즐기면서도, 회사 일정에 맞춰 일을 하는 관광객들”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워케이션이 확산되는 이유는 뭘까. 자본주의 종주국답게 철저한 시장원리가 적용되는 미국 특유의 고용관행 때문이란 답이 나온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미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해고가 가장 용이하다. 종업원 100명 이상 기업의 경우 60일 전에 통보만 하면 해당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다. 또 경영상태 악화를 수치로 증명할 수 있다면 재고용을 전제로 언제라도 해고할 수 있는 ‘일시해고제도’까지 확립되어 있다.
휴가도 마찬가지다. 유럽이나 한국과 달리, 미국은 법으로 강제하는 유급휴가 제도가 없다. 개별 고용계약에 유급휴가 조항을 넣을 수는 있지만, 자발적 사유에 따른 휴가는 ‘무급’(無給)이 원칙이다. 6월부터 9월까지 이어지는 긴 여름방학 중 미국 초ㆍ중ㆍ고교 교사들에게 월급이 지급되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해고가 용이하고 유급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고용관행이 원거리에서도 회사 업무가 가능해진 통신기술과 맞물린 것이 워케이션이라는 것이다.
근로자의 경우 스스로 숙박 및 여행 비용을 부담하기는 하지만, 구태여 무급 휴가를 쓰지 않은 채 절반은 휴가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워케이션을 선호하고 있다. 사용자도 직원의 휴가로 업무 연속성이 끊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 제도를 적극 시행 중인 중견기업 보이저의 브라이언 골딘 최고경영자(CEO)는 “전통적인 사무 환경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유급휴가를 떠나더라도 사실상 업무와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상황인 만큼 아예 일과 휴가를 결합시키는 게 회사와 근로자 모두에게 유리하다는 논리다. 사실 미국 기업의 3분의2 정도가 유사시 재택근무를 허용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는 만큼 재택근무를 보다 공격적으로 연장한 워케이션의 확산은 그리 놀랄만한 변화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워케이션에 반대하는 주장도 나온다. 우선 ‘워케이션이 효과적인가’라는 의문이다. 이는 휴가와 일을 모두 잡으려는 시도가 거꾸로 휴가도 망치고 업무 효율성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논리다. 휴가지에서 업무를 처리하겠다는 각오를 했다고는 하지만, 업무가 폭주하는 바람에 진정한 휴식을 취하지 못할 경우 워케이션은 근로자에게는 극도의 피로만 가져올 뿐이다.
워케이션이 새로운 휴가의 대안이더라도,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양극화를 확대시키는 또 다른 시도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자동차 생산라인, 식료품 공장 등 제조업 근로자들은 구조적으로 워케이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에서 가뜩이나 심화한 화이트 컬러와 블루 컬러 근로자 사이의 격차를 더욱 확대시킬 수 있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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