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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출세가 판사의 일이라면

입력
2018.06.15 21:33
수정
2018.06.1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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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포판’ 문건, 재판거래 못잖은 충격 장고 끝에 겨우 나온 ‘수사협조’ 결론 고위법관들의 안이한 인식이 더 문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배우 성동일이 맡은 한세상 부장판사는 ‘법원 수뇌부가 가장 무서워한다는 출포판(출세를 포기한 판사)’으로 등장한다. jtbc 제공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한 장면. 배우 성동일이 맡은 한세상 부장판사는 ‘법원 수뇌부가 가장 무서워한다는 출포판(출세를 포기한 판사)’으로 등장한다. jtbc 제공

서초동 뒷골목의 술자리 객담으로나 듣던 얘기였다. 겁없이 권력에 맞서거나 ‘튀는’ 언행으로 주목받는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 화자와 대상에 따라 결은 좀 달랐지만, 대체로 불편함 세 스푼, 비아냥 두 스푼에 “어쨌거나 대단하다”는 마지못한 인정이 한 스푼쯤 섞였던 걸로 기억한다. 주로 검찰에서 떠돌던 이 말이 법원 담장을 넘어 널리 퍼진 모양이다.

출세(승진)를 포기한 판사, 이른바 ‘출포판(승포판)’.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이들을 ‘문제 법관’으로 지목해 단계별 감독 강화 방안을 제안한 문건을 봤을 때 숨이 탁 막히는 듯했다. 특별조사단이 밝힌 “판결을 거래나 흥정의 수단으로 삼으려 한 흔적”들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사법신뢰’가 부관참시까지 당한 꼴이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찬찬히 따져보자. 문건은 ‘승포판’의 문제점으로 ‘출퇴근 시간 미준수, 재판업무 불성실 수행, 배석판사에 대한 부적절 언행’을 열거했다. 당연히 문제가 있는 행위들이다. 하지만 눈여겨봐야 할 건 이런 ‘문제 법관’을 ‘출세(승진)를 포기한 판사’로 명명한 점이다. 그럼으로써 다수의 성실한 법관을 ‘출세(승진)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말꼬리잡기에 불과한 억측일까. 아니다. 무릇 말이란 ‘아무 말 대잔치’로 보일지라도 뱉는 자의 내면에 자리한 태도, 즉 가치관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대응 방안까지 세세히 담은 공식문서 아닌가.

더 심각한 건 화자와 대상에 따라 쓰임새가 다를 수밖에 없는 시쳇말을 멋대로 차용해 ‘겁없이 권력에 맞서거나 튀는 언행’(많은 경우 동전의 양면이다) 모두를 ‘문제 법관’으로 범주화하는 우를 범한 점이다. 논리적 오류, 지나친 비약일까. 글쎄다.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를 보자. 주인공 중 하나인 부장판사 한세상(성동일)이 바로 ‘법원 수뇌부가 가장 무서워한다는 ‘출포판’으로 나온다. 듣보잡 대학 출신에 사시 합격도 늦은 비주류이자 막말 판사지만 “밥숟가락 무게가 세상 무엇보다 무거움을 아는 판사”, 세상 다 아는 것처럼 날뛰는 배석 판사들을 매섭게 호통치면서도 “내가 못 보던 것을 이 젊은 녀석들이 본다”는 걸 인정할 줄 아는 어른으로 그려진다. 한세상은 ‘문제 법관’인가 아닌가. 이 드라마가 현직 부장판사가 쓴 소설을 직접 극본으로 옮겨, 곧잘 판타지로 흐르는 여느 법조 드라마들에 비해 리얼리티만은 독보적이란 평을 듣는다는 것만 밝혀둔다.

내게는 뒤늦게 공개된 ‘승포판’ 문건이 양승태 사법부 시절 ‘사법농단’의 핵심인 ‘재판거래’ 의혹 문건보다 더 섬뜩하게 다가왔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 판사들이 모였다는 법원행정처에서 재판거래 시도나 판사들 뒷조사 같은 추악한 일들이 버젓이 자행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더할 수 없이 명징하게 드러내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법원은, 법관사회는 승진과 출세 욕구에 의해 굴러가는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했다는 얘기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15일 직접 수사 의뢰는 하지 않되 이미 이뤄진 고발에 의한 검찰 수사에는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장고 끝에 내놓은 어정쩡한 결론에 실망이 앞선다. “근본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개혁”도 약속했지만, 우려를 거두기 어렵다. 적잖은 법관들, 특히 더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할 고위 법관들이 재판거래 의혹을 “합리적 근거 없는 의심”이라 일축하고, 강제수사에 대해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라고 반발하면서 기둥이며 들보며 이미 썩어 무너진 집 꼴은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들은 ‘승포판’ 문건에 담긴 비뚤어진 인식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검찰 수사가 엄정하게 이뤄진다고, 몇몇 주동자를 처벌한다고 사망선고에 부관참시까지 당한 사법신뢰가 살아날 수 있을까.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의 단절은 어떻게 가능할까. 꼬리를 무는 이 물음들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답해야 할 의무는 법복 입은 판사들 모두가 함께 져야 한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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