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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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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할텐데

입력
2018.03.23 10:06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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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던 시대에는 공급자가 생산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중심으로 대중소비가 만들어지면서 소품종 대량생산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면서 공급자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소비자들이 그들의 다양한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다양한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품종 대량생산체제가 출현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에는 여러 기능을 담은 제품과 서비스보다는 최소한의 기능을 구현하는 모듈 단위의 제품과 서비스가 생산되고, 소비자는 그들이 필요한 기능을 구현하는 모듈들을 선택하고 조합해서 사용하는 모듈생산체제가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공공 서비스 영역은 시장의 흐름을 거슬러 가고 있는 듯 하다. 시장 주체들의 다양한 욕구를 무시한 채 시장의 획일화를 추구하는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가 내어놓은 '주 52시간 근무제'를 살펴보면 일과 가정에 대한 균형적인 접근을 통해서 삶의 질을 개선하고 부족한 일자리를 나누고자 하는 정부의 취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산업, 업종, 기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차별적 접근으로 인해 기업들의 혁신 속도가 느려지고 근로자들의 근로의욕도 꺾여 산업 경쟁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은 신제품을 경쟁사보다 먼저 개발하여 시장을 선점하고자 촌각을 다투며 경쟁에 몰입하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기술과 바이오 등의 분야에서는 선도 집입자가 시장을 독식하기 때문이다. 경쟁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혁신 속도는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스티브 잡스도 부러워했던 한국 기업들의 혁신 속도를 주 52시간 근무제가 늦추어 놓지 않을까 걱정이다. 미국은 법정 근로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지만 초과 근로시간에 대한 노사 합의와 초과수당 지급 여부를 철저히 관리감독하고 있다. 유럽연합과 일본은 법정 근로시간제를 운영하고 있으나 1년을 단위로 법정 근로시간을 준수하면 문제가 없으며 위반 시에는 과태료를 부과한다. 우리는 3개월 단위로 법정 근로시간을 준수해야 하며 위반 시에는 노사가 합의해도 고용주는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

제품의 수명주기는 짧아진 반면 소비자들의 요구 수준은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6개월에서 1년을 단위로 신제품 개발에 인력과 자본을 집중 투입하고 있다. 또한 신재품 개발에 필요한 고급 인력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실정을 외면한 3개월 단위의 주 52시간 근무제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대기업에 비해 추가 인력 채용이 여의치 않은 중소기업, 자본과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스타트업에게는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 성과를 얻기 위해 밤 세우기를 밥 먹듯이 하는 미국 실리콘벨리와 중국 중관촌의 스타트업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시장에서 부의 이동은 더이상 기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반면 정부의 바램대로 근로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눌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기업들이 기술개발 연구소와 생산시설을 보다 기업 친화적인 지역으로 옯기면 국내 고용 시장에서는 오히려 일자리가 줄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근로시간을 줄임과 동시에 자동화를 기반으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업의 투자와 노력이 병행되어야 근로시간을 줄이고도 기업의 경쟁력과 근로자의 임금 수준이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자동화에 투자할 여력이 없고 대기업은 자동화를 위한 노사협의를 이끌어내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과 삶에 대한 균형적인 접근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동력을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거리가 없으면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것이다. 물은 들 때가 있고 날 때가 있다. 물이 들 때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한다.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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