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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참을 수 없는 ‘채용’의 가벼움

입력
2018.02.28 20: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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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참을 수 없는 ‘채용’의 가벼움

입사 10년 차가 됐지만 취업 준비생 시절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1년3개월 다녔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2007년 하반기 다시 ‘언론고시생’이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고 이듬해 주요 언론사들은 채용 공고를 내지 않았다. 허무하게 1년 이상 백수 생활을 하면서, 퇴직금 등 1,000만원 남짓 모아둔 돈도 빠르게 사라졌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탓에 집에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적당히 굶고 적당히 끼니를 때웠다. 생애 최저 몸무게(42㎏)를 찍은 게 그때다. 경조사를 챙긴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했다. 결혼 소식을 전해오는 친구의 전화는 받지도 않고 문자에 답도 하지 않았다. 혹여 나중에 책망을 들을 때를 대비해 “휴대폰을 잃어버려 연락처를 모조리 날렸다”는 알리바이도 마련해 뒀다. 이런 혹독한 시간을 보내며 2009년을 맞았고, 언론사도 그쯤 채용 공고를 다시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1차 서류전형부터 계속 떨어졌다. 3년 전 같은 스펙으로 쉽게 통과했던 터라 충격이 컸다. 당시 채용시장에서는 ‘연령제한 폐지’가 대세였지만 나는 여전히 나이(당시 한국나이 29세)가 발목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추가로 스펙을 쌓았다. 한자능력시험 2급을 따고 토익 점수를 더 올렸다. 막 도입되기 시작한 영어말하기능력시험도 치렀다. 노력 끝에 그 해 9월 한국일보 기자가 됐다.

최근엔 ‘블라인드 채용’이 대세다. 이력서에 학벌, 지역, 가족관계 등 선입견을 가질만한 요소를 배제하고 오로지 지원자의 실력만 보고 뽑겠단 취지다. 하지만 ‘흙수저’들은 이것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란 걸 안다. 나이 많은 내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고생했던 것처럼 이 시대 평범한 취업 준비생들도 변화하는 채용제도를 믿기 보다는 자력갱생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무엇보다 최근 드러난 실상이 제도의 허점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블라인드 전형이라 윗선의 개입 여지가 없다고 항변했던 일부 금융회사들은 면접 점수를 연필로 쓰고 필요에 따라 수정했다. 그 혜택은 고위 관료, 정치인, 자산가의 자녀들한테 집중됐다. 은행 임원인 아버지가 자녀의 면접관이 돼 대놓고 합격 도장을 찍어주는 곳도 있었다. 공정함을 내세운 제도는 이들 앞에 무용지물이었다.

이처럼 특혜채용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금융회사들의 경영진 심정은 어떨지 궁금했다. 약자가 강자에게 당한 고통을 용기 내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고, 공정함이 화두가 되는 시대이니 덩달아 두려울까, 창피함이 앞설까.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상당수는 ‘비보도’를 전제로 정말 솔직하게 답했다. 하지만 “금융권 전반에서 이루어진 일들인데 운 나쁘게 걸렸다” “금융회사 특성상 자산가들 관리를 위해 채용 우대를 하는 건 좀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 “아무리 관행이라도 덜 떨어진 애를 뽑겠나. 어느 정도 실력 갖춘 애들을 뽑지” 등 반성보단 변명이 대세였다.

내로라하는 금융회사들의 인사권자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나는 혹시 내가 공개채용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 ‘자격 있는 모든 지원자에게 평등하게 지원 기회를 부여하고 공개된 경쟁시험을 통해 선발(행정학사전)’하는 전형은 어느 순간 공정함을 잃고 특별채용으로, VIP채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입사준비를 시작하는 세대로부터, 최악의 고용 빙하기(지난해 청년 실업률 9.6%)를 겪고 있는 청년들로부터 채용 과정에서 이런 식으로 신뢰를 잃게 되면 사회는 건강해질 수 없다. 정말 실력이 부족해 떨어진 가난한 취업 준비생은 ‘있는 놈’ 때문에 불합격했다고 착각할 수가 있고 성실하게 준비해서 합격한 부자의 자녀, 고위직 자녀는 억울하게 손가락질 받을 수 있다. 세대 간 갈등, 사회 분열은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더는 채용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한다.

강아름 경제부 기자 saram@hankookilbo.com

지난 2월 8일 은행권 채용비리 의혹과 관련해 검찰의 압수수색이 진행중인 서울 중구 하나은행 을지로 신사옥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채용비리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 8일 은행권 채용비리 의혹과 관련해 검찰의 압수수색이 진행중인 서울 중구 하나은행 을지로 신사옥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채용비리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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