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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구름 극장

입력
2017.10.26 11:2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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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8시 30분경 서울 남산 하늘의 구름. 두꺼운 층상고적운 가운데 구멍이 뚫려 상층 하늘의 권운(새털구름)이 내다보이는 특이한 모습이다. 왕태석기자.
26일 오전 8시 30분경 서울 남산 하늘의 구름. 두꺼운 층상고적운 가운데 구멍이 뚫려 상층 하늘의 권운(새털구름)이 내다보이는 특이한 모습이다. 왕태석기자.

이즈음 하늘이 구름 극장이다. 최고의 미술관이다. 구름, 구름들. 핸드폰으로 찍으려고 하면 어느새 방금 본 모습이 아니다. 이시영 시인은 “청청히 텅 빈 하늘, 그리고 목화송이처럼 흐르는 구름들”(‘귀래사를 그리며’)이라고 노래했다. 홍상수 감독의 ‘밤과 낮’에서 주인공은 구름만 그리는 화가로 나온다. 마지막 장면, 부부의 침대 위로 보이는 구름 그림이 이상하게 섬뜩했던 기억이 난다. ‘구름감상협회’라는 게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회원이 3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기형도 시인은 “어쨌든 구름들이란 매우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한다”(‘죽은 구름’)고 썼다. 그 어두운 시는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처음부터 창문의 것은 아니었으니”로 끝난다.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 ‘산시로’(송태욱 옮김, 현암사)에도 구름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고요해진 푸른 하늘 가까이에는 하얀 엷은 구름이 귀얄로 쓴 흔적처럼 비스듬히 길쭉하게 떠 있다.” 동경대학에 갓 입학한 구마모토 시골 출신 산시로에게 물리학 전공의 선배 노노미야는 말한다. “아래에서 보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상에서 일어나는 태풍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거라오.”

강의실 옆자리 학생은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교수 얼굴을 그리고 있다. 무슨 글귀도 보인다.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 교내 연못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 산시로의 마음을 사로잡은 미네코도 하늘의 구름을 좋아한다. 둘이 함께 가을 하늘의 구름을 바라본 적도 있다. 미네코의 결혼 소식을 접한 산시로가 빌린 돈을 갚으려 찾아간 교회 앞 겨울 하늘에도 구름이 떠 있다. “스트레이 십(stray sheep). 스트레이 십. 구름이 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산시로가 미네코를 처음 본 동경대 교내의 연못은 지금 ‘산시로 연못’으로 불린다. 내가 서울에 올라와 다닌 학교에도 연못이 있었다. 연못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거기 놓인 다리로 누군가 건너와 꽃을 떨어뜨려주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도 그때 무언가를 기다리고는 있었으리라. 그러고는 길을 잃지 않았을까. 무심한 시간의 진군, 교정에서 목도했던 죽음들. 소설 ‘산시로’ 역시 그렇게 상실과 ‘멍청한 무지(無知)’의 시간을 겪으며 구름 아래에서 길을 잃고 마는 청춘들의 이야기로 읽으면 무난할 테다.

그런데 비평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미네코의 초상화에 붙은 제목 ‘숲속의 여인’을 부정하는 산시로의 소설 마지막 행동에 주목하면서 전혀 다른 독법을 제안한다. 기실 미네코는 소설 전체에 걸쳐 연못, 양동이, 개울, 비, 귤 등등 일관되게 ‘물의 여인’으로 산시로 앞에 나타났던 것인데, 불분명한 채로 그 기억들로부터 단절된 스스로를 의식하는 순간이 이 장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에 되살아난 것은 기억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미리’ 기억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억을 되찾으려면 산시로는 처음으로 돌아가 작품을 다시 읽어야만 한다.

그러나 작중 인물인 산시로에게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를 대신해서 ‘산시로’를 다시 읽는 과제가 독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며, 그때 그 소설은 ‘산시로’가 아니라 ‘물의 여인’이라는 또 다른 허구가 된다. 산시로의 ‘무지’에 좌절한 ‘물의 여인’ 미네코가 ‘숲속의 여인’이라는 그림의 표면에 스스로를 묻어버렸기에 사정은 더욱 절박하다. 모르겠다. 왜 이 순간 소설과 소설 읽기, 삶이 얇디 얇은 표면에서 만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하스미 시게히코는 우리가 지금 깊이도 두께도 기억도 없이 사라져가는 현재라는 희박한 순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한 방식으로 환기해준다. 저기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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