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식
주필

등록 : 2015.11.12 20:00
수정 : 2015.11.12 20:00

[세상만사] ‘몽니’의 정치

등록 : 2015.11.12 20:00
수정 : 2015.11.12 20:00

눈물이 자발적 국민 공감 끌어내지만

자해위협도 때로는 의사강제의 수단

TK 민심과 비박의 허약체질이 기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주 눈물을 보였다. 박근혜 후보와의 경선 열기가 뜨겁던 2007년 5월17일 태백병원 진폐증환자를 만나 눈물을 흘렸다.

용산참사와 재ㆍ보궐선거 중간인 2009년 4월19일 홀트일산요양원 방문 때도 그랬다. 이듬해 4월19일 천안함 희생자 추모연설 때의 눈물도 유명하다. 그의 눈물은 정치적 반대자들에게는 비난 대상이었을지 몰라도, 대중에게는 잔잔한 감동을 던졌다. 오랜 재계 경력에 비추어 한참 닳았을 것이란 짐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YS와 DJ, 노무현 전 대통령 시대를 거치며 정계에는 “조선 땅에서는 앵벌이가 최고”라는 얘기가 떠돌았다. 정에 약한 국민정서도 있었지만, ‘우는 아이에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 그대로 ‘앵벌이 정치’의 재미가 쏠쏠했다. 정치적 성패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느냐 여부에 달린 것이고, 약한 모습이나 눈물만큼 사람 마음을 잡아 끄는 것도 드물다.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 정치’도 못잖다. 한나라당 대표 취임 직후인 2004년 3월30일 TV정당대표 연설에서 “마지막 기회를 달라”며 울먹이던 모습을 기억하는 이가 아직 많다. 그 덕분인지 당시 거셌던 탄핵 역풍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나름 선전했고, 열린우리당은 과반수에 턱걸이하는 데 그쳤다. 이듬해 4월의 재ㆍ보선 압승부터 현재까지 새누리당이 누려온 선거 연전연승의 기틀도 이때 마련됐다. 같은 해 12월 거의 혼자 힘으로 120여명의 소속의원을 사학법 반대로 몰고 간 것 역시 의총에서의 눈물 섞은 호소였다. 대통령 취임 이후로도 세월호 참사 등 눈물 보일 일이 많았다.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눈물뿐이 아니다. 눈물은 공감을 끌어낼 수는 있어도, ‘타인을 내심에 반(反)하는 행위로까지 이끄는 강제력’인 권력 행사에는 부적합하다. 이럴 때는 압도적 힘이 강제력의 원천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압도적 힘이 아니고도, 심지어 열세일 때도 자신의 의사를 남에게 강제하는 또 다른 유용한 수단이 있다. 바로 시쳇말로 ‘몽니’ ‘꼬장’, 또는 자해위협이다.

중학 때 껄렁껄렁하면서도 주먹 패에는 들지 않았던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보여준 호신용 주머니칼은 넙적한 쇠붙이 끝에 V자 홈을 파서 1㎝도 안 되는 날이 양쪽에 선 모양이었다. 그 아래는 헝겊을 단단히 감아 세게 찔러도 더 이상은 날이 들어가지 않는 구조였다. 용도가 재미있었다. 주먹 패가 위협하면, 그 칼을 꺼내어 자신의 배나 허벅지를 찔러 피를 보이며 눈을 치뜨면 하나같이 물러난다는 얘기였다. 주먹 패가 그를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기세로 보아 감수해야 할 피해가 그를 제압해 얻을 가치보다 더 크다는 계산이 있었다. 그런 합리적 선택이 세상 모든 ‘꼬장’이나 자해협박의 통용 원리다. 약소국의 ‘고슴도치 전략’도 마찬가지다. 앞발 하나를 영 못쓰게 될 각오가 아니라면 감히 나를 먹으러 들지 말라는 고슴도치의 경고는 효과적이다. 맹수로서는 발바닥의 고통이 고슴도치의 죽음보다 무거운 셈이다.

박 대통령이 6월 ‘유승민 사태’ 당시 거론했던 ‘국민 심판론’을 최근 5개월 만에 다시 꺼내 들었다. ‘몽니’의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무성한 선거개입 논란은 실없다. 대신 발언의 실질은 대구ㆍ경북(TK)의 콘크리트 표심에 근거해 여당 내 비박(非朴) 세력에 대한 몽니 내지 자해위협에 가깝다. 6월에 당내 다수파인 비박이 열세인 친박(親朴)의 뜻에 따른 것은 ‘여차하면 같이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자해위협에 불안을 느낀 때문이다. TK나 영남을 넘어 수도권에까지 미칠 악영향에 대한 우려가 비박의 자유의지를 제약했다.

그런 경험이 비박에게 트라우마가 된 현실에서 몽니의 정치는 더욱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유족함에 젖은 여당 주류에 팔 하나쯤 내어줄 용기나, 박 대통령과 친박에 버금갈 ‘악과 깡’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자꾸만 강화해주는 전망이다.

/황영식 논설실장 ysh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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