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미 기자

등록 : 2018.05.27 11:00

‘단지 우유’ ‘박사’ ‘박포’… 그 맛에 목욕 간다

등록 : 2018.05.27 11:00

목욕을 하고 나서 ‘바나나맛 우유’를 마시는 건 흔한 풍경이었다. 드라마 '고백부부'의 한 장면. KBS 제공

1970~1980년대에 유년 시절을 보낸 이들이 보편적으로 지닌 기억이 있다. 주말 아침, 늦잠 자고 싶은데 목욕탕에 데려가려는 부모와 매번 실랑이를 벌였던 장면이다.

등쌀에 못 이겨 목욕탕에 끌려가고도 끝이 아니었다.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한쪽 팔을 붙잡고 인정사정 없이 때를 벗겼다. 그렇게 목욕대전을 치르고 나서도 씩씩대다가 탈의실에서 선풍기 쐬며 마신 바나나맛 우유, 삼각 커피우유 하나에 마음이 녹곤 했다.

사우나에서 땀을 많이 흘리고, 뜨거운 탕을 들락날락해서일까. 유독 목욕을 한 뒤, 시원한 물 한 모금이 절실해진다. 이에 목욕탕에는 작은 냉장고에 각종 음료수를 갖춰두고, 최근엔 탈의실 구석에 음료를 파는 매점을 두는 추세다. 신현영 명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목욕을 하는 동안, 체내에서 보상작용이 일어날 정도로 극심하진 않더라도 조금씩 수분 손실이 일어난다"며 “음료로 수분을 보충해주는 것은 좋지만, 고열량이나 고당분의 음료보다는 될 수 있으면 물을 충분히 마셔주는 게 좋다"고 말했다.

4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국민 목욕탕 음료’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와 서울우유 커피포리우유. 빙그레ㆍ서울우유 제공

추억의 바나나맛 우유, 삼각 커피우유

‘어릴 적 목욕탕 음료’로 각인된 빙그레의 바나나맛 우유와 서울우유의 커피포리우유(삼각우유)는 1974년 같은 해에 탄생했다. 딱히 목욕탕의 고객을 겨냥하고 출시한 것은 아니지만, 목욕탕이 생겨나던 시기와 출시가 맞물려 자연스럽게 목욕탕에서 많이 팔리게 됐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조용국 빙그레 홍보부장은 “간식거리가 부족했던 1970년대 바나나는 ‘부의 척도'라 여겨질 정도의 고급 과일이었는데, 이를 대중적인 우유에 접목해 인기를 얻게 됐다"고 말했다.

40여 년 간 ‘목욕탕 음료’로 자리매김하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겼다. 빙그레에서는 2014년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지원동기를 묻지 않기로 했다. 지원자 대부분의 자기소개서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목욕탕에 갔다가 먹었던 바나나맛 우유를 잊지 못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차별성이 없다는 게 하나의 이유였다.

최근 여탕에서는 ‘목욕탕 바리스타’가 직접 제조한 음료가 인기다.

“박사? 박포? 여탕에만 있다는 음료수"

1990년대 이후 동네 대중목욕탕을 찜질방이 대체하면서, 목욕 시설 내에 매점을 갖춘 곳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탈의실을 지키는 매점 아주머니는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주는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커피 분말과 물을 휘휘 저어 만든 아이스커피를 플라스틱 물병에 담아 파는가 하면, 식혜며 매실 진액 같은 품이 드는 음료도 수요만 있다면 만들어 팔았다. 이에 ‘여탕벅스(여탕과 카페 프랜차이즈인 ‘스타벅스'를 합친 것)’와 ‘목욕탕 바리스타'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맛있는 제조 음료로 입소문 난 경기 의정부 S 사우나의 음료 레시피를 살펴봤다.

조명선(65)씨와 양숙경(59)씨는 매일 아침 35인분 밥솥 3개 분량의 식혜를 직접 만드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7시부터 시작한 식혜 만들기는 11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난다. 이렇게 만든 식혜도 이틀이면 동이 난다. 매실 진액은 숙성한 지 4년, 오미자 원액은 2년 된 진국이다. 알고 보니 조씨는 서울 노원구에서 전문 차실(茶室)을 운영하는 차 전문가인데, 20년 동안 공부한 다과 지식을 목욕탕에서 십분 발휘한다.

다음날 판매할 식혜를 만드느라 양씨의 손이 분주하다.

손님이 주문하면 즉석에서 물병에 얼음과 음료를 담아 내어준다.

‘월 목욕권'을 구매해 매일 이곳에서 씻는 A(49)씨는 “다른 목욕탕에 많이 다녀도 비싸고 귀한 ‘보이차'를 파는 곳은 못 봤다"며 “살얼음이 뜬 식혜도 일품이라 자주 마신다"고 말하면서 엄지를 내밀었다. 조씨는 “음료의 맛도 맛이지만, 목욕탕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 수다 떨며 마셔서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소주와 맥주도 섞어 먹는 ‘폭탄주’의 민족이어서일까. ‘여탕벅스’에서는 카페인 음료와 다른 음료를 섞은 ‘폭탄 음료’가 대세다. 카페인 음료를 섞은 폭탄 음료에 시원한 얼음을 곁들이면, 목욕을 하면서도 쉽게 지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양씨는 “직접 재료를 만드는 게 고되지만, 손님들의 ‘맛있다’는 한 마디에 피로가 풀린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식혜, 커피, 오미자차, 데박, 매실차, 박사. 이혜미 기자

1,000ml 플라스틱 물병에 담은 시원한 음료 하나면 더운 목욕탕과 사우나에서 너끈하게 버틸 수 있다. 이혜미 기자

※ 목욕탕 폭탄 음료 레시피

1. 박사 (박카스+사이다)

1) 700ml 플라스틱 물병의 3분의2 정도 얼음으로 채운다.

2) 사이다 245ml 한 캔과 박카스 한 병을 넣고 섞는다

2. 박포 (박카스+포카리스웨트)

1) 700ml 플라스틱 물병의 3분의2 정도 얼음으로 채운다.

2) 박카스 한 병과 포카리스웨트 245ml 한 캔을 넣고 섞는다.

3. 데박 (데미소다 오렌지+박카스)

1) 1,000ml 플라스틱 통 절반을 얼음으로 채운다.

2) 박카스 두 병과 데미소다 오렌지 250ml 한 캔을 넣고 섞는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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