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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

입력
2017.04.25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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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인 테크니온 공과대학은 1912년에 개교했다. 지난 2012년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테크니온이 발행한 우표에는 일종의 조그만 드론이 인쇄돼 있다. ‘나노 낙하산’이라는 이름의 이 물건은 테크니온의 다니엘 바이스 교수가 개발했다. 나노 낙하산은 대기 중의 독성물질을 감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과 늘 군사적 긴장관계에 있는 나라이다. 만약 적군이 어느 지역에 독성물질을 살포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바이스 교수의 해법은 이렇다. 작은 건전지만한 나노 낙하산을 의심 지역에 수천 개 살포한다. 민들레 홀씨의 원리가 적용된 나노 낙하산은 공중에 떠다니면서 독성물질에 따라 자신의 색깔을 바꾼다. 지역 주민이나 군인들은 그 색깔을 보고 오염지역과 자신의 위험여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수준의 위성, 로켓, 항공기 등의 기술은 대부분 군사적 목적에서 개발되었다. 인접국들과의 전쟁위협을 늘 이고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자기가 처한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이 낳은 산물이다. 나노 낙하산도 그 중의 하나이다. 2년쯤 전 어느 교수로부터 바이스 교수의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왜 한국에서는 이런 기술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당시에 한국에서도 드론이나 3D 프린터, 인공지능 같은 첨단기술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다. 한 가지 큰 차이점은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대체로 과학기술 선진국에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부터 명확하게 설정하고 그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능한 모든 수단과 아이디어를 총동원한다. 우리는 순서가 반대이다. 선진국에서 이 기술이 뜬다고 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우리가 직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온 기술이 아니라 남이 좋다고 하니까 모방해서 얻은 기술이다. 첨단 기술이 나올 때마다 언제나 ‘한국형’이라는 수식어가 나붙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훌륭한 추격자는 될지언정, 결코 선도자는 되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국가안보를 과도하게 미국에만 맡겨 놓은 대가가 생각보다 크다. 우리가 우리 국방을 책임지면서 몸으로 익힐 수 있는 노하우를 모두 포기하는 셈이다. 그런 노하우와 전통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큰 자산이다. 우리에겐 전시 군사작전권도 없다. 북한군에 비해 한국군이 가장 부족한 역량은 독자적 전쟁수행능력이라는 말도 나온다. 국가방위를 남의 나라에 의존하다 보니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과 의지, 관련 기술개발, 이를 뒷받침하는 물자의 조달과 제도의 정비 모두 부족하다.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즉 사드는 우리가 원해서라기보다 미국이 원해서 설치하는 무기이다. 나노 낙하산의 사례를 벤치마킹해 보자면, 북한 핵실험과 핵무장을 가장 철저하게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기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시작전권 환수는 나 몰라라 하면서 국가안보를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대선 레이스가 격화하면서 안보를 외치는 후보 치고 전시작전권 환수에 적극적인 후보가 없다. 이들이 말하는 안보는 모두 거짓말이다.

게다가 21세기의 국가안보는 단순히 주변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처만을 뜻하지 않는다.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났을 때 오염된 공기의 흐름이 궁금했던 국민들은 한국 기상청이 아니라 독일 기상청 홈페이지에서 정보를 얻었다. 만약 중국 동해안의 수많은 원자력 발전소 중 하나에서 후쿠시마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어쩔 것인가? 지금의 미세먼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난이 닥칠 것이다. 확률은 낮을지 모르나 구조적인 개연성은 열려 있다. 21세기의 국가안보는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해서 다시 정의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 전에, 우리는 지금 이 급변하는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를 사회적 합의로 도출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스스로 과제를 설정하는 방법을 잘 배우지 못했다. 한국 교육을 돌아보면, 과제 설정은 선진국에서나 하는 일이고 우리는 남이 설정해 놓은 과제 속에서 열심히 계산하고 답을 내는 데만 길들여졌다. 이렇게 배우는 공부가 재미있을 리 없다.

위대한 석학들은 질문을 잘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질문은 그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그 속에 답이 있다. 전대미문의 국정농단과 대통령 파면으로 치러지는 이번 대선에서 우리는 얼마나 본질적 질문을 던져 왔던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이런 고민과 토론을 전 국민적으로 해 보는 자리가 대선 아니던가?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대선 후보들의 저질 TV토론을 지켜보자니 그저 한숨만 나온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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