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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포커스] '백마 탄 왕세자', 실장님 드라마 닮아가나요

입력
2017.06.0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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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군주'에서 연인에게 목걸이를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세자 이선(유승호)은 2012년 MBC '해를 품은 달'의 이훤(김수현)을 연상시킨다. MBC 방송화면 캡처
MBC '군주'에서 연인에게 목걸이를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세자 이선(유승호)은 2012년 MBC '해를 품은 달'의 이훤(김수현)을 연상시킨다. MBC 방송화면 캡처

#1. “너, 정혼자가 있느냐?” MBC 드라마 ‘군주-가면의 주인’(‘군주’)의 조선 세자 이선(유승호)은 사랑하는 여인 한가은(김소현)에게 마음을 저돌적으로 표현하는 로맨티스트다. 난생처음 세상 밖으로 나갔다가 가난한 백성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거나,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 대해 신분을 떠나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도 지녔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감히 내 앞에서 멀어지지 마라. 어명이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MBC ‘해를 품은 달’(2012)의 왕 이훤(김수현)을 연상케 한다.

#2. KBS2 드라마 ‘7일의 왕비’에서 훗날 중종이 되는 이역(연우진)은 정혼자로 만난 신채경(박민영)과 소매치기범을 잡는 등 소소한 사건으로 정을 쌓는다. 그는 “신채경과 절대 혼인하지 않겠다”며 철부지의 모습을 보이다가 어느덧 채경에게 묘한 설렘을 느낀다. 유약한 왕족이 우연히 여주인공을 만나 티격태격하며 사랑을 싹 틔우는 모습은 ‘구르미 그린 달빛’(‘구르미’) 속 이영(박보검)과 홍라온(김유정)이 빚어낸 연정을 닮았다.

젊고 사랑스러운 왕세자들이 지상파 방송을 점령했다. ‘군주’, ‘7일의 왕비’에 이어 7월에는 MBC ‘왕은 사랑한다’에서 가수 겸 배우 임시완이 고려 최초의 혼혈왕 왕원을 연기한다. 케이블채널의 장르 드라마에 밀린 지상파 방송이 ‘백마 탄 왕세자’를 내세워 실지 회복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 속 왕세자나 왕은 ‘해를 품은 달’(‘해품달’)의 이훤 캐릭터를 답습하며 식상한 전개를 펼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왕의 사랑을 한껏 받는 여주인공이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룬다는 조선시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는 가난한 여인이 재벌가 남자와 사랑에 빠져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현대 배경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는 비판도 있다. ‘안방극장에 본부장, 실장님의 시대는 가고 왕세자 전성시대가 열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2012년 MBC '해를 품은 달' 이후 로맨스 사극 속에 젊고 사랑스러운 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MBC 방송화면 캡처
2012년 MBC '해를 품은 달' 이후 로맨스 사극 속에 젊고 사랑스러운 왕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MBC 방송화면 캡처

실장님은 왜 왕세자가 됐나

국내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는 오랫동안 유지해온 이야기 공식이 있었다. 일 중독자 본부장이 사내 신입 영양사와(OCN ‘애타는 로맨스’)와 밀어를 속삭이거나, 아내를 잃은 아픔을 가진 백화점 경영기획실장은 판매사원과(MBC ‘다시 시작해’) 사랑에 빠지는 식이었다.

하지만 여주인공이 부유한 남성을 도약대 삼아 상류층에 합류한다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여성을 남성의존적으로 묘사하며 가부장제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실장님 본부장님 판타지’가 설 자리를 잃자 드라마 제작사들은 신분제도가 엄존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 유사한 환상을 심기 시작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한 실장님과의 사랑보다는 시청자가 경험해보지 못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왕과 평민의 사랑으로 판타지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이 작용했다”고 말했다.

비현실성이 짙은 현대 배경 로맨틱 코미디에 비해 판타지를 좀 더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점도 ‘왕세자 로맨스’의 등장을 가속화하고 있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사극은 현대보다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며 “여기에 실장의 역할을 왕이 하는 방식으로 현대 로맨스 드라마의 구조를 따르면서 시너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의 로맨티스트 왕세자 이영(박보검)은 '해품달' 이훤(김수현)과 비슷한 성격의 인물이다. KBS 제공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의 로맨티스트 왕세자 이영(박보검)은 '해품달' 이훤(김수현)과 비슷한 성격의 인물이다. KBS 제공

‘해품달’ 아류작? 반복되는 로맨스 구조

‘백마 탄 왕세자’가 등장하는 사극은 진부한 이야기 전개라는, 현대물의 전철을 밟고 있다. 철없는 세자는 소녀를 만나고 부정부패 세력과 맞서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왕으로 거듭난다는 이야기 얼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7년 전까지 사극 속 왕들은 중후한 인상에 풍성한 수염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MBC ‘선덕여왕’(2009)의 진평왕(조민기), KBS2 ‘성균관 스캔들’(2010)의 정조(조성하)는 궁 안에서 활동하며 주인공들의 활약을 빛내주는 조연으로 움직였다.

‘해품달’의 꽃미남 왕 이훤(김수현)이 등장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그는 수염 하나 없는 말간 얼굴에 용포를 갖춰 입고 “잊으려 하였으나 너를 잊지 못하였다”라며 여심을 녹였다. ‘해품달’이 최고시청률 42.4%(닐슨코리아 기준)를 달성하자 이후 제작되는 로맨스 사극에 젊은 왕 캐릭터가 속속 등장했다. 한 드라마 홍보사 관계자는 “‘해품달’, ‘구르미’의 성공 이후 두 드라마의 흥행 요소를 차용한 사극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청춘 사극이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참신한 캐릭터를 구축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해품달’ 이후 나오는 왕 캐릭터가 모두 비슷한데, 공식처럼 퍼져있는 로맨스 설정에서 새로움을 끌어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김 평론가는 “새로운 캐릭터나 설정을 발굴하지 않으면 결국 시청자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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