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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한국야구 100년과 봉황대기 고교야구

입력
2017.08.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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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게구름이 피어 오르는 여름하늘 아래의 성동원두(城東原頭ㆍ서울 동대문운동장)에 모인 선수는 37개교 630여 명’ (1971년 8월 8일 한국일보)

15회 봉황대기전국고교야구대회-부산고VS광주상고 결승전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15회 봉황대기전국고교야구대회-부산고VS광주상고 결승전 장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나라에 최초로 야구를 전해준 사람은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로 알려져 있다. 이후 야구팀은 1912년 김전, 허성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첫 해외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비록 참담한 전적(1승 1무 5패)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이 원정에서 선진 야구 기량을 습득하였고, 눈높이가 높아진 것은 틀림없다. 일제강점기에도 학생 야구대회를 통해 기량과 실력은 차분히 축적되어 왔다.

무엇보다 고교야구 발전에 기여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신문사 주최의 대회다. 광복 이듬해 1946년 자유신문사는 조선야구협회의 협조를 얻어 ‘청룡기쟁탈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입장요금 학생표 1원 50전, 일반표 2원)를 개최했다. 이 대회를 계기로 각 신문사는 경쟁하듯 고교 야구대회를 창설했다.

한국전쟁 종전 이듬해 1954년에 한국일보가 창간된다. 한국일보는 창간 이벤트로 ‘육ㆍ공군 야구 대제전’을 개최했고 ‘전국도시대항야구대회’ ‘재일교포학생야구단방문경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 초청경기’ 등을 통하여 사명(社名)을 알리고 독자층을 넓혀갔다. 이렇듯 축적된 야구이벤트 경험을 살려 고교야구가 인기 절정에 달하던 1971년 ‘봉황대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를 창설하게 된다.

한국일보는 널리 고교야구의 최정상을 가리는 대회라는 의미로 대통령의 문장(紋章) 인 ‘봉황’을 대회 명칭으로 사용했다. 이름에 걸맞게 봉황대기 고교야구는 기존대회와는 차별화된 내용이 있다.

조희준 박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조희준 박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첫째, 지역예선전을 거치지 않아 야구부가 있는 전국 모든 고교생들에게는 동대문운동장 흙을 밟으며 야구 실력을 뽐낼 기회가 주어졌다. 서울의 철도고, 청량고, 호남의 광주고, 전남고 등은 생소한 팀이었고, 봉황야구로 인해 야구팬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전통의 강팀이 무명의 팀에게 혼쭐이 나는 장면은 팬들을 더욱 열광시켰다.

둘째, 여름방학 중인 8월에 개최된다는 점이다. 방학기간 중에 대회 참가는 학업의 연장선이다. 한국일보는 대회 창설 시부터 학업과의 연계를 고려했다. 대회 자체가 과외활동 또는 특별활동이었으며,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고교야구 주말리그’의 근본취지와 일맥상통한 대회인 동시에 학생야구 본연의 취지에 부합된 야구축제임란 점이다.

셋째, 1974년부터 일본 거주 교포학생을 모아 재일교포 팀을 결성하여 고국 땅에서의 대회에 참가시켰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청소년 문화 소유자들끼리 우애를 싹 틔우는 기회를 주었으며, 야구를 통해 스포츠맨십을 키우고, 야구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교환하기에 충분한 대회였다. 또한 조국의 의미를 교포선수들의 마음에 담아주는 역할과 동시에 민족의 단일성을 깨닫게 해주는 부수적인 역할도 했다.

봉황대기 고교야구는 그 동안 수많은 스타들을 탄생시켰고, 더 나아가 한국 프로야구 태동의 밑거름이 됐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프로야구의 인기는 봉황야구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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