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의전은 괴로워”… 부장님만 즐거운 송년회

알림

“의전은 괴로워”… 부장님만 즐거운 송년회

입력
2017.12.19 20:00
13면
0 0

“직장인 56% 송년회 참석 부담”

삼행시ㆍ장기자랑 준비는 필수

집까지 바래다주는 의전 당연시

상사 생일^맛집 등 파일 만들어

의전 방식 매뉴얼로 전수되기도

“인사 평가 불공정 불안감이

스스로 의전하게 만들기도”

“도대체 누구 좋자고 하는 송년회인지 모르겠어요.”

3년 차 직장인 박모(33)씨는 “12월 한 달간 프로젝트, 팀, 부서 단위로 예정된 회사 송년회가 5개나 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회식 자리도 상사 눈치 살피느라 불편한데, 연말 들뜬 분위기에서 보다 성대하게 진행되는 송년회에선 심적 부담과 스트레스가 커진다”는 것. 그는 “미리 숙취해소음료를 챙겨 두는 건 기본, 높은 분들 흥을 돋우기 위해 삼행시 건배사 장기자랑 하나쯤 준비하는 건 필수, 부하직원이 상사를 일대일로 맡아 집에 모셔다 드리는 건 센스로 통한다”고 했다.

송년회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단 회식이 잦아지는 연말, “송년회가 괴롭다”고 신음하는 직장인도 덩달아 늘고 있다. 19일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설문조사플랫폼 두잇서베이가 2,887명을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56.3%)이 송년회 참석을 부담스러워 했다. 부담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낀다’는 이들은 ‘의전(儀典)’을 이유로 꼽았다. 국가 간 공식의례에서 통용되는 예법 등을 뜻하는 의전은 어느새 직장인들에겐 ‘상사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는 일련의 행위’라 읽히고, 업무 연장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최근엔 평범하지 않은 송년회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도리어 직장인들 스트레스 지수만 높이고 있다. 식당 예약 등 회식 관련 일을 도맡아 한다는 5년 차 직장인 주모(30)씨는 “상사들이 ‘특별한 회식을 준비해 보라’는 통에 요리 강습, 가상현실(VR) 게임, 가면무도회 등 후보를 추려 보고한 게 수 차례”라며 “상사 취향을 일일이 물어 송년회를 짜는데 업무 시간을 쏟아, 정작 업무를 위해서는 야근을 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공식 업무도, 의무 사항도 아니지만 직장인들은 “의전이 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순전히 업무로 인정받겠다’는 생각은 어리석단 얘기다. 지방자치단체 소속으로 두 달 전부터 주말행사 주관 부서에서 근무하게 된 고모(27)씨는 “토요일 주민 행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승진 시험을 앞두고 인근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상사가 점심을 혼자 드시지 않도록 모셔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라며 “업무를 잘 하냐보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게 훨씬 중요하단 걸 깨닫게 됐다”고 했다.

매뉴얼이란 꼬리표를 달고 의전 방식이 업무 노하우처럼 전수되기도 한다. 대기업 6년 차 정모(34)씨는 “신입사원 교육 후 부서 배치를 받자마자 사수(직속 선배)가 메일로 전송한 파일엔 회사 근처 맛집 리스트, 대리운전기사 전화번호, 상사 생일 등 기념일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라며 “‘막내는 막내 일만 잘하면 된다’는 사수의 조언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의전을 사랑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이도 없는데, 의전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먼저 나이, 연공서열에 따른 위계를 유독 강조하는 한국 특유 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김동원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상사가) 읽지도 않을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등 일련의 비효율적인 일은 윗사람에 대한 예의, 의식을 과도하게 중시하는 유교 문화가 조직 곳곳에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평가 제도에 대한 불신도 꼽힌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부장님이 삼겹살을 좋아하든, 돼지갈비를 좋아하든 신경 쓰지 않아도 능력으로 공정하게 평가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즉 인사 평가 제도가 공정하지 않을 것이란 불안감이 부하직원 스스로 의전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