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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희망의 뿌리는 절망

입력
2017.05.0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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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끝 무렵 광양시의 한 도서관. 나는 무대로 올라가 강사를 소개했다. “허허벌판에 소나무 한 그루 서 있으면 얼마나 큰 쉼이 될까요, 허허벌판에 오두막 한 채 있으면 얼마나 큰 위안일까요. 우리 시대의 한 그루 소나무 같은 분을 모셨습니다. 여러분, 정호승 시인을 우리 살면서 쳤던 가장 뜨거운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진정 정호승 시인을 좋아하므로 이 소개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내가 문학에 빠져들던 스무 살 즈음에 가장 많이 산 책이 정호승 시집이었다. 읽으려고 산 것보다 선물하려고 산 것이 더 많았다. 누구에게 선물할 일이 있으면 다른 고민할 것 없이 정호승 시집을 포장해서 주었다. 내가 평생에 걸쳐 살아가고 싶은 길이 그 시집들 속에 있어서였다. 북뮤지션 활동을 한 이후 정 시인과 함께 행사를 진행할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무대로 올라온 시인은 우리 인생에서 놓쳐서는 안될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객석은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시인은 사랑 대신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러분, 시인이라고 용서가 쉬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용서를 행하기 위해 수많은 길을 돌아다녔습니다.” 시인은 용서야 말로 사랑의 끝 지점에 있다고 했다. 보기에도 사랑스러운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용서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다.

시인은 일찍이 그의 시 ‘맹인 부부 가수’에서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 ... /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라며 용서의 길을 떠났다. 이 시에서 예언했듯 용서는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 끝에 찾아온다. 시를 발표하고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시인은 그 동안 찾아낸 용서의 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어찌 그 이야기의 가치가 크지 않을까. 사랑은 용서라는 깊은 뿌리에서 자양분을 먹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이어서 시인은 객석에서 듣기 원했을 희망 대신 절망을 이야기 했다.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일부) 시인은 희망은 진정한 희망을 얻기 위해 “절망의 손을 먼저 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별이 반짝이는 것은 그 별을 둘러싼 어둠 때문이다. 절망을 모르는 희망은 실체가 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동안 겉만 빛나는 껍데기 희망에 속아 왔는지도 모른다.

새로 창작한 시 노래도 들어보고, 시에서 뽑아낸 퀴즈를 맞추며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대숲에 이는 바람 소리는 바람의 ○○이다 / 산사의 풍경 소리는 진리의 ㅇㅇ이다/ 노숙자의 어깨 위에 고요히 내리는 함박눈은 희망의 ○○이다” 관객들은 ‘침묵’이라는 정답을 찾기 위해 여러 번 소리 내어 시를 읽었다. 봄밤의 시 읽는 소리는 정말 산사의 풍경 소리와도 같았다.

어느덧 마지막 질문의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도 기차를 타실 건지, 그리고 기차를 타면 늘 그랬듯 책을 읽으실 건지 질문했다.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오늘은 빈 가방으로 왔습니다. 요즘은 책보다는 차창 밖을 내다봅니다. 책에서는 읽을 수 없는 세상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저 풍경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해보세요. 책도 좋겠지만 풍경 읽기를 권합니다.” 이미 우리는 풍경 읽기를 잘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권면하실 필요가 없다고 내가 응수했더니 객석 모두가 웃었다. 마치고 나서도 헤어짐이 아쉬워 우리는 시인과 희망의 사진을 찍었다. 그 동안 우리 모두는 충분히 절망과 맞서 왔으므로 희망의 사진은 아주 선명하게 잘 나왔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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