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에 등산객 발길 뚝
산악자전거 달리기에 최적
영하 12도 날씨에도 문제 없어
목요일(28일) 아침. 추위가 누그러졌다지만 공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반바지에 타이즈를 입다가 몸이 부르르 떨리는 통에 등산복을 꺼냈다. 현관을 나서자 쨍한 한기가 코끝을 스쳤지만 돌아설 수는 없었다. 산악자전거(MTB)의 천국, 겨울 산이 열렸기 때문이다.
귀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데 자전거를 탄다니 이상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등산객과 산을 나눠 쓰는 MTB 동호인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자전거 타기야 선선한 가을이 가장 좋지만 등산객과 마찰도 많은 계절이다. 인적 끊긴 산등성이를 온전히 차지하고 달리는 재미는 겨울에만 맛볼 수 있다.
●등산객-MTB 신경전 지쳐요
사실 MTB가 신나게 달릴 때는 등산객을 만나는 일이 드물다. 대개 인파로 북적이는 등산로보다 늦봄까지 낙엽이 수북이 쌓이는 인적 드문 오솔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건물 복도를 가로지르듯, 다른 오솔길로 넘어갈 때 일어난다. 아무리 동선을 잘 짜도 한번은 등산로를 지나치기 마련인데, 등산객 입장에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자전거와 마주치니 놀랄 수밖에 없다. 따뜻한 말 한마디면 끝날 상황이 곧잘 미묘한 자존심 대결로 번지고 불쾌한 고성이 오간다.
자전거 인구가 빠르게 늘면서 다툼도 잦아졌다. 특히 수도권 MTB인구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경기도는 등산객의 민원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 최근엔 MTB의 등산로 출입을 막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경기도에 따르면 부천시는 자전거의 둘레길 출입을 막는 조례 제정을 추진하다가 포기했다. 법제처에서 ‘국민의 권리는 보다 높은 단계의 법을 통해서만 제한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받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자전거의 등산로 출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결국 산림청은 지난해 7월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숲길마다 안내문을 붙이도록 지침을 내렸다. 골자는 등산로에선 등산객이 먼저이니 자제(서행)해 달라는 것. 백기종 사무관은 “국민의 권익이 충돌하는 문제이니 법으로 막는 것만이 해결책은 아니다”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MTB동호인도 불만이 있다. 나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타는데도 괜히 눈을 흘기는 등산객이 많다는 하소연이다. 실제로 경기도에 지난 2년간 보고된 MTB관련 민원사례 중에 등산객 충돌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 경기도 숲길 관리를 담당하는 전성호 주무관은 “숲이 워낙 넓으니 막는 데도 한계가 있다”며 “일단 해외의 갈등 해결 사례를 수집하는 단계”라고 전했다.
●혹한도 못 막은 山사랑
그래서 겨울에도 MTB동호인은 산을 포기하지 않는다. 추위가 매서워지면 서너 시간씩 숲을 쏘다녀도 등산객 그림자도 구경 못하는 날이 많다. 헐벗은 나무 사이로 시야가 30~50미터씩 트여 멀리 보기도 편하다. 등산객이 나타나도 나뭇가지 사이로 화려한 등산복이 비치기 때문에 일찍 멈출 수 있어 안전 걱정도 덜하다. 평일 낮이면 마음 놓고 신나게 달리기 딱 좋다. 이맘때면 도심 산에서도 단체 라이딩을 즐길 정도다.
올 들어 가장 추웠던 24일에도 MTB동호인들은 산을 누볐다. MTB는 바퀴에 땅을 파고드는 돌기가 있어 웬만한 눈길은 거침없이 달린다. 이날부터 눈이 내린 며칠 동안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MTB동호인의 겨울 산 체험기가 줄을 이었다. 아침 기온이 영하 12도까지 떨어졌지만 “아무튼 탈만 했어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눈 쌓인 내리막길을 달리는 동호인 모임부터 혼자 고요한 숲을 달리며 ‘스노우 라이딩’을 즐겼다는 사람도 있었다.
8년째 자전거로 산을 넘어 출퇴근한다는 ‘정이아빠’ 우재춘(48)씨는 춥지 않느냐는 질문에 “언덕을 오르면 10분도 안돼 땀이 난다”라며 “겨울에는 특히 더 눈 내린 산은 너무 좋지 않나요. 눈 쌓이고 거기를 내가 타이어로 밟는 소리를 듣고 풍경도 그런 게 좋아요”라고 덧붙였다.
낙엽이 쌓인 길은 빙판만큼 미끄럽지만 실력이 쌓이면 일부러 뒷바퀴를 흘려 스릴을 즐기기도 한다. MTB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격렬한 종목인 ‘다운힐(downhill)’을 즐기는 네이버카페 DH클럽 회원 ‘왕만두’씨가 그런 사람이다. 그는 혹한기훈련을 다녀왔다며 산속 빈터에 동호인들이 마련한 MTB 전용공원을 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렸다.
왕만두씨는 훈련하기에는 겨울도 부족함이 없는 계절이라고 설명했다. 험난한 지형을 내려가는 만큼 MTB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퀴가 땅에 붙어 있어야 안전하다. 바퀴가 공중에 뜨는 순간 방향을 조정하기가 불가능하고 금세 나무나 바위 따위에 들이받기 마련이다. 미끄러운 겨울 숲에 바퀴를 미끄러뜨리며 노면을 읽고 브레이크를 잡는 감각을 익힌다. 그는 “가장 스릴 있고 남자다운 운동 아니냐”며 웃었다.
●도전정신 불태우기엔 겨울도 좋다
서울 아차산 끝자락에 자리잡은 점프대는 아직 용이 되지 못한 꿈나무(?) MTB동호인이 많이 찾는 도전과제다. 동호인들이 ‘아차산 배밭길’이라 부르는 소로 끝에 누군가 MTB용 장애물을 여럿 설치해 뒀다. 높이는 1미터 남짓으로 여기서 뛰어내린 다음 ‘인증샷’을 올리는 사람이 많다. 산을 내려서면 변변한 대중교통조차 없는 탓에 등산객에게 외면당한 길이지만 자전거족에게는 놀이공원이나 마찬가지다.
쓰고 보니 위험천만한 운동 같지만 MTB 이용자 폭은 세대를 넘나든다. 앙증맞은 헬멧을 눌러쓰고 아빠와 함께 언덕을 오르는 어린아이부터, 화려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70대까지 겨울 산의 신선한 공기를 누리는 데는 나이가 따로 없다. 예컨대 포털에서 ‘배밭길 점프대’를 검색해서 나오는 사진들만 봐도 청년보다 중년 이상이 더 많다. 다운힐 종목이 아니고서야 도로를 달릴 때만큼 속도를 내는 일도 드물다. 자전거 지식이 전혀 없는 초보도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등 유명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만 하면, 산 정상까지 이끌어줄 마음씨 좋은 고수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겨울 산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산을 내려왔다. 어둑해지는 숲 입구에 자전거를 세우고 주저앉았다. 돌길을 덜컹거리며 내달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막상 혼자서 아등바등 돌무덤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찍은 뒷모습을 보니 어쩐지 처량하다. “아이고, 젊은이가 대단해” “위험해 살살 타”라며 격려하고 손뼉 치시던 어르신들 목소리가 없으니 쓸쓸하기까지 했다. 등산객과 좁은 길에서 서로 먼저 지나가라 권하다 웃고, 주저앉아 커피 한잔 나눠 먹는 일도 재미있었는데. 꼴을 보니 산을 영원히 독차지해도 즐겁지만은 않을 것 같다.
겨울은 짧다. 등산객 어르신도 돌아오리라. 온갖 청승을 떨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뱀발’씨가 인터뷰 끝에 남긴 말이 생각났다. “무릎 망가져서 등산을 그만두기 전엔 암벽을 탔죠. 그때도 싫어하는 사람은 있었어요. 산은 암벽화를 신고 가도, 맨발로 가도 좋습니다. 남을 배려한다면 말이죠. 저한테는 자전거도 등산스틱 같은 거예요, 산을 즐기는 방법만 다른 거죠. 결국 우리도 등산하는 거라니까요.”
김민호기자 kimon8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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