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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석학칼럼] 마르크스는 여전히 유효한가?

입력
2018.05.27 18:3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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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한 1949년부터 40년 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까지 카를 마르크스는 절대적인 역사적 중요성을 유지했다. 지구상의 인구 10명 중 4명이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운 정부의 국민이었고,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도 좌파의 지도이념은 마르크스주의였다. 우파 역시 반(反)마르크스주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소련과 위성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하자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급락했다. 지난 5월5일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었다. 이젠 그의 예측이 결과적으로 억지였고, 그의 이론은 신빙성이 없으며,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황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왜 여전히 그가 남긴 유산에 주목해야 할까.

마르크스의 명성은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운 정권들이 자행한 잔혹행위들 때문에 심각하게 훼손됐다. 물론 마르크스 자신이 그런 범죄들을 지지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하지만 정작 공산주의를 붕괴시킨 건 경제였다. 과거 소련ㆍ동구와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시행되는 동안 공산주의 정권은 인민들에게 자본주의 세계의 국민들과 견줄만한 삶의 질을 제공하는데 실패했다.

이런 실패는 마르크스가 구상한 공산주의에 흠결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건 아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마르크스의 흠결은 보다 근본적인 곳에 있었다. 그건 바로 인간 본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에는 인간의 천성적이거나 생물학적 본성이 전혀 감안되지 않았다. 그가 ‘포이에르바하의 테제’에서 쓴 인간성의 핵심은 ‘사회관계에 따른 조화’이다. 그런 생각에 따르면 인간의 사회관계를 바꾸면, 예를 들어 경제적 토대나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변화를 주면, 새로운 사회에서의 인간은 과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인간과는 매우 달라질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같은 확신을 얻는 데 있어서 경제체제 변화 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거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헤겔의 역사관을 적용했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의 목적은 인간 영혼의 해방이다. 그리고 그런 해방은 각자가 모두 보편적인 인간이성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 성취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같은 이상주의자의 생각을 유물론자의 생각 안에 적용시켰다. 그리하여 역사를 이끄는 동력은 인간의 물질적 요구이며, 해방은 계급투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도식을 만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계급은 보편적 해방을 일구는 수단이 된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사유재산제도에 반대하며, 따라서 생산수단의 공유를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공유하면 사유재산제도 하에서의 경제 시스템에 비해 ‘전체의 부’가 넘쳐 흘러 더 이상 분배의 문제 역시 벌어지지 않는다고 봤다. 그게 바로 그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소득이나 상품의 분배 문제를 세세히 따져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이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회를 더 이상 혁명이 필요치 않은 사회로 여긴 이유이기도 하다.

소련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체제를 무너뜨린다고 해도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거의 모든 인간은 공동의 선을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권력과 특권, 그리고 그 자신들의 호의호식을 추구하는 이기적 행태를 멈추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한 거대한 나라에서도 집단적 번영보다 개인의 번영이 가장 왕성하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마오쩌둥 치세 때 중국은 가난했다. 중국 경제는 마오쩌둥의 후계자인 덩샤오핑이 사기업을 허용한 1978년 이후 급속히 성장했다. 덩샤오핑의 개혁은 결국 8억 명의 인구를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으나, 아울러 다른 어떤 유럽 국가보다도 소득불평등이 커진 사회를 만들어냈다. 비록 중국은 여전히 중국식 사회주의를 건설 중이라고 주장하지만, 중국 경제에서 사회주의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지적 영향은 남아있다. 그의 유물론은 비록 희석됐지만 여전히 인간 사회의 운동방향을 결정짓는 힘을 이해하는 한 축으로 여겨지고 있다. 마르크스는 인류에게 맷돌은 봉건사회를, 증기기관은 자본주의사회를 도래하게 했다는 단순한 얘기만 한 게 아니다. 그는 이후에 훨씬 복잡하게 작동하는 사회 역학을 제시했다.

마르크스의 역사관에서 가장 시사적인 대목은 ‘~이 아니다’라는 부정에 있다. 사상과 종교, 정치체제의 진화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도구와 별개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 도구를 조직하는 경제체제와도 별개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또한 그 경제체제가 생산하는 이윤과도 무관할 수 없다는 얘기다. 만약 이런 사실이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자명한 진실로 여겨진다면, 그만큼 마르크스주의가 우리에게 깊이 내재화됐다는 얘기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피터 싱어 미국 프린스턴대 생명윤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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