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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돌 한국일보 특종사진으로 보는 ‘그때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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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돌 한국일보 특종사진으로 보는 ‘그때 그 시절’

입력
2017.06.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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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창간된 한국일보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호흡했습니다. 1960년 4ㆍ19 혁명 때도, 1977년 한국인 산악인이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반을 했을 때도, 2008년과 2016년 서울 광화문광장에 촛불을 든 시민들이 가득 찼을 때도 한국일보 기자들은 현장을 지키며 그 생생한 모습을 담았습니다.

9일 한국일보 창간 63돌을 맞아 한국일보 특종 보도사진에 담긴 ‘그때 그 시절’을 돌아봅니다.

피투성이 된 채 ‘부정선거 무효’ 부르짖다 - 1960년

1960년 4ㆍ19 혁명 당시 총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고등학생 이영민(왼쪽)씨를 대학생 현태길(가운데)씨가 부축하고 있다. 백형인 전 한국일보 기자
1960년 4ㆍ19 혁명 당시 총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고등학생 이영민(왼쪽)씨를 대학생 현태길(가운데)씨가 부축하고 있다. 백형인 전 한국일보 기자

1960년 4ㆍ19 혁명 당시 ‘부정선거 무효’를 부르짖던 중 총을 맞아 피투성이가 된 고등학생 이영민(왼쪽)씨와 그를 돕는 대학생 현태길(가운데)씨의 모습이 백형인 전 한국일보 기자의 렌즈에 담겼다. 4ㆍ19혁명 당시 삼엄한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이 사진은 당시에는 이승만 정권의 계엄령으로 국내에 보도되지 못했지만 외신에 소개되면서 한국의 상황을 세계에 알렸다.

탈영한 실미도 북파공작원의 최후 고스란히 – 1971년

1971년 8월 실미도를 탈출한 684부대원들은 서울 영등포구 인근에서의 총격전 끝에 수류탄을 터뜨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동완 전 한국일보 기자
1971년 8월 실미도를 탈출한 684부대원들은 서울 영등포구 인근에서의 총격전 끝에 수류탄을 터뜨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동완 전 한국일보 기자

1968년 1월 21일 북한 소속 군인 31명이 한밤에 청와대를 기습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잠입한 이들은 치열한 격투 끝에 대부분 사살됐다. ‘1ㆍ21 사태’라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북한군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이라 불린다.

위협을 느낀 박 전 대통령은 1968년 4월부터 인천의 외딴 섬 실미도에 북파 목적 비밀부대인 684부대를 창설한다. 총원 31명의 부대원들은 외부와의 교류도 끊은 채 비밀 암살훈련을 받았다. 훈련도중 7명이나 사망할 정도로 가혹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1971년 남북화해분위기가 조성돼 작전이 불확실해지자 장기간의 혹독한 훈련에 불만을 품고 실미도를 탈출한다. 그러나 이들은 하루도 안 돼 진압됐고, 부대원들 중 일부는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목숨을 끊는다. 사진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보여준다.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 등반한 고상돈 대장 – 1977년

1977년 9월 고상돈 대장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등반 성공을 알리며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7년 9월 고상돈 대장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등반 성공을 알리며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7년 9월 5일 낮 12시 40분. '77 에베레스트 한국원정대'의 고상돈 대장이 해발 8,848m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섰다. 한국인이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한 것은 당시가 최초다. 고 대장은 당시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뒤 쌓인 눈을 손으로 파헤쳐 성경 한 권과 사진 석장을 묻어 등반 도중 목숨을 잃은 동료들을 추모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일보는 대한산악회와 함께 등반을 준비했고 김운영 기자가 특파원으로 동행했다.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 – 1986년

1986년 5월 20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거행된 5월 축제 개막식 도중 원예과 이동수씨가 학생회관 4층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 채 투신하고 있다. 사진은 계엄령 아래에서 보도되지 못하다가 외신으로 먼저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권주훈 전 한국일보 기자
1986년 5월 20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거행된 5월 축제 개막식 도중 원예과 이동수씨가 학생회관 4층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 채 투신하고 있다. 사진은 계엄령 아래에서 보도되지 못하다가 외신으로 먼저 보도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권주훈 전 한국일보 기자

1986년 5월 20일 오후, 서울대학교 축제 도중 학생회관 4층 옥상 난간에서 구호가 들려왔다. “전두환을 처단하자” “폭력경찰 물러가라” “어용교수 물러가라”. 목이 터져라 외치던 학생은 갑자기 불덩어리가 되어 떨어졌다. 서울대 원예학과 83학번이던 이동수가 분신하며 떨어지던 장면을 현장에 있었던 권주훈 기자가 렌즈에 담았다. 이씨가 사망 후 발견된 수첩에서는 “아니오, 라고 말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노예가 된다”고 써 있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생생한 현장 – 1987년

1987년 6월 10일 부산 문현로터리 부근에서 열린 가두시위를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저지하자 한 시민이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달려가고 있다. 고명진 전 한국일보 기자.
1987년 6월 10일 부산 문현로터리 부근에서 열린 가두시위를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저지하자 한 시민이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달려가고 있다. 고명진 전 한국일보 기자.

1987년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6월 26일, 부산시 문현로터리에는 부산 6ㆍ26 평화대행진에는 ‘민주화 및 민권회복’을 바라는 부산 시민 4만 여명이 모였다. 경찰이 이들의 행진을 향해 최루탄을 발사하며 가두시위를 저지하자 한 시민은 웃옷을 벗고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경찰을 향해 달려갔다. 처절한 표정의 시민 뒤에 펄럭이는 큰 태극기가 대비되는 이 사진은 미국 AP통신이 꼽은 ‘20세기 100대 사진’에 선정됐다.

전쟁 포로의 ‘뒤늦은 귀대신고’ – 1994년

1994년 10월 25일 국군수도병원에서 탈북에 성공한 조창호(왼쪽) 소위가 이병태(오른쪽) 국방부장관에게 43년만의 귀대신고를 하고 있다. 왕태석 기자.
1994년 10월 25일 국군수도병원에서 탈북에 성공한 조창호(왼쪽) 소위가 이병태(오른쪽) 국방부장관에게 43년만의 귀대신고를 하고 있다. 왕태석 기자.

한국전쟁 전사자로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혀있던 조창호(왼쪽) 소위가 1994년 살아 돌아왔다. 조 소위는 전쟁 중이던 1951년, 중국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후 북한 전역의 광산 등지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다. 1994년 그는 가까스로 탈북에 성공했다. 국군수도병원에서 지친 몸과 맘을 달래던 그는 10월 25일 병원을 찾아온 이병태 국방부장관에게 귀환을 보고했다. 44년 3개월이라는 아득히 긴 군 생활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경제위기 그리고 분노 – 1999년

1999년 6월 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해 지지자들과 악수를 하던 중 붉은 페인트가 들어 있는 달걀을 얼굴에 맞았다. 고영권 기자
1999년 6월 3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해 지지자들과 악수를 하던 중 붉은 페인트가 들어 있는 달걀을 얼굴에 맞았다. 고영권 기자

1997년 이후 몇 년간 한국 사람들의 마음은 얼어붙었다. 1997년 기업의 연쇄 도산과 외환보유액 급감으로 경제위기가 시작됐고,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 국가 부도 위기를 넘겼을 때다. 간신히 국가부도 위기는 넘겼지만, 가장들의 실업이 이어졌고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1999년 6월 3일 오전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김포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받던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시민 박의정씨가 붉은색 페인트가 담긴 달걀을 던졌다. 박씨는 “IMF 사태로 나라를 망친 사람을 응징했다”며 동기를 밝혔다. 경제위기를 막지 못한 전직 대통령에게 시뻘건 페인트를 던질 정도로 사람들의 분노는 컸다.

촛불에 휘감긴 광화문 광장 – 2008년

2008년 6월 6일 미국산 수입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는 서울 태평로가 시민들로 가득 찼다. 김주성 기자.
2008년 6월 6일 미국산 수입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는 서울 태평로가 시민들로 가득 찼다. 김주성 기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그 해 현충일인 6월 6일에는 당시 역대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가 열렸다. 경찰 추산 5만 6,000여명, 주최측 추산 20만 여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사상 첫 대규모 촛불시위는 이날까지 평화롭게 진행됐다. 젊은 부모들이 어린아이를 안고 찾아왔을 정도다. 그러나 최대 인파가 모인 사진 속 이날 다음부터 일부 시위대와 경찰 측의 충돌로 분위기가 격해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8년의 촛불시위는 교복부대도, 엄마부대도 주권자로서 거리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늘에서 본 상처투성이 세월호 – 2017년

지난 3월 23일 오전 세월호 침몰 해역인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 앞바다에서 중국 인양업체인 상하이샐비지의 재킹바지선 두척이 세월호 인양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세월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진도=박경우 기자.
지난 3월 23일 오전 세월호 침몰 해역인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 앞바다에서 중국 인양업체인 상하이샐비지의 재킹바지선 두척이 세월호 인양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세월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진도=박경우 기자.

2017년 3월 23일, 바닷속에 잠겨있던 세월호가 1,073일만에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슨 채 떠오른 선체에는 ‘SEWOL’이라는 글씨마저 지워져있다. 3년 만에 인양된 세월호에서는 4명의 미수습자들이 발견됐지만, 여전히 3명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깨지고 부식된 세월호의 표면은, 국가적 참사의 피해자들 그리고 이를 지켜본 국민들이 견뎌온 무거운 시간을 보여주는 듯 하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자료조사 박서영 solu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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