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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기자의 경계의 즐거움] 극단 차이무의 'B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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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기자의 경계의 즐거움] 극단 차이무의 'B언소'

입력
2010.02.16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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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색에 잠겨있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은 사색이 다 돼 간다." 공중 화장실을 차지하려는 별의별 상황이 벌어지다, 튀어나오는 말이다. 본인은 죽을 지경이지만, 비비꼬며 참는 모습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배꼽을 쥔다.

극단 차이무의 'B언소(蜚言所)'는 번잡한 도시의 공중 화장실 문 안팎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20여명의 배우들을 통해 그린다. 변소에서 오가는 B급 언어를 통해, 몇 개의 화장실밖에 없는 제로섬 사회가 바로 한국이라고 말한다. 빨리 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 타인의 고통은 안중에 없는 이기심만이 횡행할 뿐이다.

우리 화장실은 생리적 요구를 처리하는 데가 아니다. 중국 취업자들이 식사와 휴식을 해결하는 장소이기도, 사회 생활하면서 얻은 분을 못 삭여 욕을 퍼붓는 데이기도, 때로는 동성애자가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작ㆍ연출자 이상우는 이 같은 소통 부재의 상황을 27개로 분할, 각양각색의 웃음으로 치환시킨다. 웃음이라는 코드의 중심에 별의별 B급 언어가 있다.

이미 조폭 영화에서 익숙해진 말들이지만, 연극 무대에서는 한 치 흐트러짐도 없는 배우들의 움직임에 힘입어 보다 활력을 띤다. 극단 특유의 집단 앙상블이 고도로 활성화된 결과다. 영화와 TV 등 매체에서도 바쁜 문성근, 강신일마저 그들의 고향인 연극 무대로 돌아와 이 작품을 빛나게 하는 데 몸을 사리지 않는다. 한 사람만 특별히 부각하는 법은 없는 무대지만, 그들은 후배를 무색하게 하는 연기로 극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연극은 한국이라는 제로섬 사회에 대한 아픈 풍자다. 시쳇말로 소통 부재의 우리 사회를 겨누는 이 연극의 생명력은 무엇보다 온갖 텍스트에서 언어 재료를 끌어다 제 것으로 만드는 기동성에 있다. 허드렛 매체들로부터 빌어온 말을 비롯, 박상우의 시 '상소리 해부도'와 최상일의 책 <백두대간 민속기행> 등 여러 차원의 언어 재료가 동시대 관객을 즐겁게 한다. 이 작품이 빛 본 지 6년이지만 어제 뽑아올린 것 같은 이유다.

그간 서로 칼을 갈아 온 이념 콤플렉스를 놓칠 리 없다. 배를 움켜쥐고 몸을 꼬며 순서를 기다리다 새치기하는 어디에 서 있었느냐며 따지는 말은 영락없는 사투(思鬪)다. "왼쪽이야, 오른쪽이야?" 어느 줄에 서 있었느냐는 이 질문에 "중도다"라는 답이 나온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객석의 웃음보가 또 터진다.

결국 난장판으로 끝나는 무대는 엄청난 쓰레기 앞에 투덜대는 환경미화원의 몫이다. 모든 소란의 끝, 탁발승이 나와 화장실의 문을 다 닫아주고 퇴장한다. 마지막 무대에 덩그러니 남는 것은 구겨질대로 구겨진 신문지에 적힌 '2020'이다. 정부의 청사진은 휴지 조각이 됐다. 구겨질대로 구겨진 신문에서 관객은 비언소가 겨누는 총끝이 바로 오늘의 현실에 가 있음을 깨닫는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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