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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한국 민주주의 생명수’ 씨알의 함성이 곧 촛불의 함성

입력
2018.02.28 04:4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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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독립ㆍ민주화운동 함석헌 선생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에도 앞장

민중 의미하는 ‘씨알 사상’ 통해

평화로운 대동사회 건설 꿈 꿔

고난의 역사에 민주주의 씨앗 뿌려

재야는 국가에 맞선 시민사회 뜻

반독재 투쟁 주도한 재야의 정신

4ㆍ19, 1987, 촛불혁명으로 이어져

민주주의 발전에 지속적 생명력

'씨알' 사상으로 널리 알려진 함석헌(1901~1989) 선생. 평북 용천 출신으로 오산학교에서 스승 류영모를 만났고 일본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를 배웠다. 1958년 장준하의 '사상계'에 글을 발표하면서 문필가이자 사상가로서 널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평생 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비롯,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의 제 일선에 섰다. 함석헌기념관(도봉문화재단)제공
'씨알' 사상으로 널리 알려진 함석헌(1901~1989) 선생. 평북 용천 출신으로 오산학교에서 스승 류영모를 만났고 일본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를 배웠다. 1958년 장준하의 '사상계'에 글을 발표하면서 문필가이자 사상가로서 널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평생 독립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비롯,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의 제 일선에 섰다. 함석헌기념관(도봉문화재단)제공

내년은 우리 역사에서 뜻 깊은 해다. 3.1운동 100년과 임시정부 100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하는 헌법 전문(前文)에서 볼 수 있듯, 3.1운동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출발점을 이룬다.

1919년 4월 11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제로 함”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나요? 있소. 대한 나라의 과거에는 황제는 1인밖에 없었지마는 금일은 2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요. 제군 모두가 황제요.” 임시정부의 한 주역인 안창호가 1920년 임정의 신년축하회 연설에서 한 말이다. 대한민국의 ‘민국(民國)’이란 ‘국민의 나라’임을 뜻한다. 이렇듯 2019년은 대한민국이 국민이 주인인 나라임을 당당히 선포한 100년이 되는 해다.

대한민국 100년을 돌아보면, 우리 현대사는 일제 강점기와 민족해방운동, 남북 분단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그리고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역사를 이끌어온 힘의 하나는 사상이었다. 새로운 제도와 의식을 주조하는 게 집단적 실천이라면, 사상은 그 실천을 상상하고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산업주의와 근대주의,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페미니즘과 에콜로지 등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사유와 이론과 이념을 포괄한 사상이었다.

앞으로 나는 이 기획에서 지난 100년을 대표하는 사상가들의 삶과 생각을 살펴보려고 한다. 격동의 현대사에서 문화적·정신적 삶의 향상을 위해 헌신하고 세계적 경향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고민해온 지식인들의 사상적 고투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미래 100년은 절로 열리지 않는다. 과거 100년의 지성사를 성찰적으로 돌아볼 때 새로운 100년을 힘차게 출발할 수 있는 법이다. 이 기획의 이름을 ‘100년에서 100년으로’라 붙인 까닭이다.

사상가 함석헌 선생은 많은 글을 남겼다. 한길사에서 1987년 내놓은 함석헌 전집.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상가 함석헌 선생은 많은 글을 남겼다. 한길사에서 1987년 내놓은 함석헌 전집. 한국일보 자료사진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2010년 교수신문은 일제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우리 지성사에서 근대 국민국가 만들기에 나섰던 대표적인 인물을 선정한 바 있다. 당시 함석헌은 1위를 차지했다. 젊은 세대에게 함석헌이라는 이름이 낯설겠지만, 100년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함석헌은 가장 주목할 만한 사상가였다.

함석헌(1901~1989)의 삶은 지난 20세기 우리 역사에 그대로 대응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교육을 받고 교사가 돼 독립운동을 벌였다. 광복 후 소련군에 의해 옥고를 치른 다음 월남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에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민주주의와 민중 담론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 특히 그의 씨알(씨알) 사상은 동서양 사상을 융합한 독창적인 철학이었다. 더욱이 그는 민족주의를 중시하면서도 협애한 민족의식을 넘어선 보편적 세계주의로 나아갔다.

함석헌은 많은 글을 썼다. 도서출판 한길사는 그의 글을 모아 저작집 30권을 펴냈다. 제1권 ’들사람 얼’에서 제30권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느 전문학자보다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쳤다. 이 가운데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그의 대표 저작이다. 원본은 일제강점기에 ‘성서조선’에 발표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다. 함석헌은 1962년 제목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꾸고 내용을 수정했으며, 1965년에 다시 개정판을 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관통하는 역사관은 ‘고난의 사관’이다. 함석헌은 우리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봤다. 신라의 통일 이래 한국전쟁까지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은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였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고난의 역사! 한국역사의 밑에 숨어 흐르는 바닥 가락은 고난이다. 이 땅도 이 사람도 큰 일도 작은 일도 정치도 종교도 예술도 사상도 무엇도 무엇도 다 고난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갖는 의의는 식민사관, 유물사관에 맞서 정신사관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재해석한 데 있다. 그리스도가 고난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해방을 이끌었듯, 고난의 한국 역사는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는 역설의 역사라는 게 함석헌의 역사철학이었다. 철학자 김상봉은 함석헌이 고난과 슬픔을 통해 자신에게 복귀하고 자신과 하나가 되는 반성적 자기인식을 요구한 독창적인 사상가라고 평가했다. 아카데미 역사학의 시각에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규범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함석헌에 중요한 것은 역사에 내재한 ‘뜻’, 다시 말해 ‘의미’다. 의미란 개인이든 사회든 존재의 가장 중요한 이유다.

글을 쓰는 함석헌 선생. 식민지,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다 보니 투사의 이미지가 강했을 뿐 함석헌 선생 스스로는 구도자라 했다. 함석헌기념관(도봉문화재단) 제공
글을 쓰는 함석헌 선생. 식민지, 군부독재 시대를 거치다 보니 투사의 이미지가 강했을 뿐 함석헌 선생 스스로는 구도자라 했다. 함석헌기념관(도봉문화재단) 제공

씨알의 사상

함석헌 사상의 키워드는 ‘씨알’이다. 함석헌은 씨알을 스승 유영모로부터 배웠다. 씨알이란 말은 유영모가 ‘대학(大學)’에 나오는 ‘민(民)’을 ‘씨알’로 번역한 것에서 비롯된다. 씨알에는 ‘하나님의 씨(아들)’와 ‘평민’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유영모가 전자를 주목했다면, 함석헌은 후자를 중시했다.

“국(國)은 나라라 하면 되고 인(人)은 사람이라 하면 되지만 민(民)은 뭐라 할까? (...) 그 민이란 말을 씨알이라 하면 어떠냐 하는 말입니다.” 이렇듯 씨알은 다름 아닌 민중이다. 씨알이란 개념에는 민중의 주체성과 평등성이 담겨 있다. 민중이 역사와 사회의 중심이며 서로 평등하다는 것은 함석헌 사유의 중핵을 이뤘다. 신학자 김경재가 말했듯, 씨알 사상은 생명의 주체성·책임성·영성을 되찾아 평화로운 대동사회를 이루겠다는 생명·평화사상이라 할 수 있다.

함석헌 사상이 우리 지성사에서 갖는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함석헌은 씨알의 사상가다. 씨알의 사상은 민중 담론은 물론 민주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우리 현대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58년 사상계에 발표한 에세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통해서였다. “나라의 주인은 고기를 바치다 바치다 길거리에 쓰러지는 민중이지 벼슬아치가 아니다. 구원은 땅에 쓰러져도 제 거름이 되고 제 종자가 되어 돋아나는 씨알”에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둘째, 함석헌은 한국적 모더니티의 이상을 추구한 사상가다. 씨알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골고루 잘 살며 다른 민족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세계가 그가 꿈꿔온 나라다. 이 나라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나와 타자, 기독교와 동양사상, 고난과 구원 사이에 스스로를 세워뒀고, 그 경계 위에서 둘을 아우르려는 한국적 사상의 모험을 감행해 왔다. 지난 100년에서 함석헌을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사상가로 꼽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6년 11월 광화문광장을 가득 매운 촛불. 이 촛불이 곧 씨알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년 11월 광화문광장을 가득 매운 촛불. 이 촛불이 곧 씨알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재야의 미래

함석헌은 재야(在野)를 상징했다. 재야란 벌판에 있음을 뜻한다. 최근 용법으로 바꾸면, 재야란 공적 기구가 아닌 민간 조직, 곧 시민사회를 말한다.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에서는 재야의 역할이 중요했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에 정치사회의 기본 구도가 정치세력들 간의 대립보다는 정부 대 재야의 대립, 즉 국가와 시민사회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재야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권력에 맞서는 도덕, 지배자에 맞서는 민중, 군사독재에 맞서는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재야의 역사적 기원은 조선시대 산림파의 선비정신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재야를 관통하는 사상적 거점은 민중주의와 민주주의였다.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등은 이 재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재야는 군부독재 시기에 반독재투쟁을 주도했다.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또한 재야로부터 작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87년 이후 민주화 시대에 크게 성장한 시민운동은 재야운동이 분화되고 전문화된 버전으로 볼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이뤘던 1960년 4ㆍ19혁명, 1987년 6월항쟁, 2016년 촛불혁명을 이끈 힘은 정의롭지 않은 국가에 맞선 재야의 저항에 있었다.

오늘날 재야는 고색창연한 개념이다. 그러나 권력과 지배에 맞서서 주권자인 국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계몽했던 재야의 정신, 다시 말해 시민사회의 정신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끌어온 사상이었다. 다가올 100년에서 민주주의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 국민주권을 추구하는 재야의 정신은 한국 민주주의에 지속적인 생명력을 부여할 것이다.

김호기(연세대 교수ㆍ사회학)

※다음주부터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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