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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ㆍ분석의 학문 생태학, 페인 이후 실험과학이 됐다

입력
2016.07.09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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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페인은 미국 북서부 해안 불가사리 실험을 통해 특정 종, 특히 최상위 포식자의 생태계 기여도를 입증했고, 생태학의 실험과학적 가능성을 개척했다. 그는 교육자로서도 드문 모범을 보였다. 워싱턴대 홈페이지(washington.edu)에서.
로버트 페인은 미국 북서부 해안 불가사리 실험을 통해 특정 종, 특히 최상위 포식자의 생태계 기여도를 입증했고, 생태학의 실험과학적 가능성을 개척했다. 그는 교육자로서도 드문 모범을 보였다. 워싱턴대 홈페이지(washington.edu)에서.

어떤 모임에나 거멀못 같은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특별히 유능하거나, 유머감각이 탁월하거나, 사람들을 잘 챙기거나, 돈을 잘 내거나…. 그건 리더나 총무의 덕목이지만 그런 이가 늘 리더나 총무인 건 또 아니다. 생태계에도 그런 종이 있다. 크든 작든 모든 생태계는 생산자(식물)에서부터 초식동물- 포식동물- 최상위 포식자- 분해자에 이르는 영양 단계별 개별 종들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유지되지만, 생태계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균등하지는 않다. 잔인한 말이지만, 멸종을 해도 영향이 제한적인 종이 있고 전체 생태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종도 있다. 그런 종을 생태학에서는 ‘핵심종(Keystone Species, 혹은 쐐기종)’이라고 부른다.

해양 생태학자 로버트 페인(Robert Paine)은 63년 7월, 미국 워싱턴 주 올림픽 반도의 마카 만(Makah Bay, 머코우Mukkaw 만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인적 없는 바다의 한 무인도에서 혼자 긴 쇠막대기를 들고 별난 실험을 시작했다. 조간대(潮間帶ㆍ만조기에 물에 잠기고 간조기에 드러나는 구역) 바위에 붙은 불가사리(오크리 불가사리 Pisaster Ochraceus)를 일삼아 뜯어내 바다 깊은 곳으로 집어 던지는 거였다. 불가사리는 홍합 따개비 말미잘 삿갓조개 등 바위에 붙어 사는 무척추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포식자. 조개류처럼 몸의 건조를 막아줄 껍질이 없기 때문에 조간대에서는 주로 깊은 구역에서 먹이활동을 한다.

페인은 주기적으로 섬에 들어가 집요하게 그 실험을 하며 생태계의 변화를 관찰했고, 3년 뒤인 1966년 충격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불가사리 한 종을 없앴더니 실험지역 내 15종이던 생물 종이 8종으로 줄었고, 그나마도 홍합(캘리포니아 홍합 Mytilus Californianus)의 독무대가 됐다는 거였다. 언뜻 봐선 개구쟁이 장난 같아 보이는 저 실험이 관찰ㆍ분석 중심의 생태학을 “실험 과학’이 되게”했고(프린스턴 대 Simon Levin 교수), 지금은 상식적으로 보이는 그 논문이 생태계 이해와 관리ㆍ보존의 획기적 전기가 됐다. 60년대 생태학의 혁신을 주도한 로버트 페인이 6월 13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최초의 생태계 개입 연구

최상위 포식자의 기여 밝히려

무인도서 불가사리 제거 실험

3년후 생태계 붕괴, 홍합 독무대

66년 논문 발표 폭발적 반응

페인(Robert Treat Paine Ⅲ)은 1933년 4월 13일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스턴 미술박물관(Museum of Fine Arts) 큐레이터였고, 어머니는 작가 겸 사진가였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독립선언서 서명자의 한 명인 로버트 페인이 그의 할아버지다. 2013년 워싱턴대 학회지 인터뷰에서 그는 “2살 반 무렵 지저분한 찻길에 앉아 개미들을 관찰하던 기억이 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자연에 완전히 매료되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소년 탐조가 boy birder’이기도 했다. 또래들과 함께 뉴잉글랜드의 숲을 누비며 새와 나비 도롱뇽 등을 관찰하고 자신이 본 모든 걸 기록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그 모든 게 생태학자에겐 멋진 훈련이었다고 그는 말했다.(nature.com, 13.1.16)

54년 하버드대(동물학)를 나와 군복무를 마친 뒤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택한 전공은 고생물학이었다. 화석 연구를 하다 지질학에 마음을 줄까 말까 하던 무렵, 생태학자 프레드 스미스의 담수 무척추동물 수업을 들었고 그의 적극적인 권유로 유년의 로망이던 생태학으로 관심이 급선회한다. 바위에 갇힌 데본기의 화석동물보다는 살아있는 생명과 그들의 위태로운 생태에 구미가 당긴 거였다. 그는 활동적인 학자였다. 완족류(조개)를 연구하던 스미스의 샘플 채취 작업을 돕던 50년대 말 그는 자신의 폭스바겐 밴을 몰고 플로리다 해안을 누비고 다니는 게 일이었다고 말했다.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에서 박사후과정을 밟은 후 62년 워싱턴대에 자리를 잡았다.

생태학에서 ‘HSS 가설’이라고 부르는, 헤어스턴ㆍ스미스ㆍ슬로보드킨의 공동 논문 ‘군집의 구조와 개체군의 제어와 경쟁’이 발표된 게 1960년이었다. 그들은 논문에서, 한 생태계에서 특정 종의 개체군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먹이 제약 때문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생산자 즉 식물과 달리 포식 동물은 종간ㆍ종내 먹이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고, 초식동물의 개체군 크기는 먹이인 생산자가 아니라 포식동물의 개체군 크기에 영향을 받는다는 거였다.

저 가설을 검증하는 게 당시 생태학계의 과제였고, 젊은 생태학자 페인이 워싱턴 주 바닷가에서 애먼 불가사리와 씨름을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검증이 필요하다면 직접 실험을 해보자는 것. 관찰-가설- 검증이 아니라 생태계에 직접 개입해 실험을 한다는 건 당시로선 ‘혁명적인 발상’이었다.(nautil.us, 16.6.2)

마카 만의 타투시(Tatoosh) 섬은 올림픽반도 해안에서 1km 가량 떨어진, 마카인디언보호구역내 무인도였다. 우연히 연어낚시를 갔다가 그 섬의 생태계와 절묘한 통제환경에 착안한 그는 곧장 원주민 족장을 찾아가 협조를 청했다. 마카족이 내건 조건은 ‘무덤들은 훼손하지 말라’는 것 단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봄ㆍ여름엔 월 2회, 겨울에는 월 1회 섬에 들어갔다. 처음엔 혼자, 나중엔 동료ㆍ제자들과 동행했다. 종과 개체 수를 세고 서식밀도를 계산하고, 추이를 기록하고 예측했다. 그가 포식패턴을 조사하기 위해 해부한 불가사리가 1,000마리가 넘었고, 관찰 기록만 가죽 장정 노트 20권이 넘었다. 약 석 달이 지난 첫 해 9월, 이미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홍합과 따개비가 늘어나기 시작한 거였다. 하지만 1년 뒤인 이듬해 6월, 따개비도 줄기 시작했고 4종의 바닷말이 거의 사라졌고, 삿갓조개와 딱지조개류 말미잘 해면체들도 자취를 감춰갔다. 반면에 작은 포식 달팽이(thais emarginata)는 무려 20배나 증가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홍합의 약진이었다. 홍합은 폭 8m 조간대 거의 전역을 독점하게 됐다. 포식자(불가사리)가 사라짐으로써 이동성과 공간경쟁력에서 가장 탁월한 홍합이 다른 무척추동물의 서식 공간을 잠식한 거였다. 최상위포식자의 생태적 가치를 소개한 데이비드 쾀멘의 저서 ‘신의 괴물’(이충호 옮김, 푸른숲) 추천사에서 최재천 교수는 불가사리와 같은 알파 포식자의 역할을 “시장을 독점하려는 몇몇 대기업들의 횡포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정부의 기능”에 비유했다.

불가사리를 잡아놓은 타투시 섬의 페인. 그는 학자로서 생태계에 과감히 개입함으로써 인간의 생태계 개입의 위험성을 실험적으로 폭로했다. 생태계의 쐐기돌 같은 종이란 의미의 '핵심종'이란 개념을 처음 만든 것도 그였다. naturalhistoriesproject.org
불가사리를 잡아놓은 타투시 섬의 페인. 그는 학자로서 생태계에 과감히 개입함으로써 인간의 생태계 개입의 위험성을 실험적으로 폭로했다. 생태계의 쐐기돌 같은 종이란 의미의 '핵심종'이란 개념을 처음 만든 것도 그였다. naturalhistoriesproject.org

페인은 ‘Journal of American Naturalist’에 발표한 66년 논문에 저 실험 결과를 발표했고, 이후 논문들에서 ‘핵심종’과 ‘영양 폭포(Trophic Cascade)’라는 개념으로 그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영양 폭포’란 불가사리 즉 핵심종이 사라진 뒤 이어지는 생태계 2차 붕괴를 지칭하는 용어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당시 생태학계를 이끌던 프린스턴의 천재 학자 로버트 맥아더(Robert MacArthur, 1930~1972)는 그에게 “당신의 논문이 모든 걸 바꿀 것”이라고 극찬하는 편지를 썼고(NYT, 16.6.17), 그는 논문을 청하는 이가 너무 많아 1,200부를 추가로 찍어 ‘저널’에 전달해야 했다. 의기양양해진 그가 집에 가서 자랑을 했더니 당시 뉴욕타임스에 과학 칼럼을 쓰던 어머니가 “내 얘기도 들어볼래? 수질 보존에 관한 내 칼럼을 본 위스콘신 상원의원이 유권자들에게 배포하겠다며 20만부를 보내달라고 했다지 뭐니”라고 응수하는 바람에 머쓱해졌다는 얘기를 2013년 ‘BioDiverse Perspectives’ 인터뷰에서 소개했다. 그 말끝에 그는 “그 둘은 물론 아주 다른 청중이지만, 어머니의 청중이 아마 훨씬 중요한 이들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후학 양성에도 힘 쏟아

현장 중심의 연구 ‘페인학파’

네이처에서 다룰 만큼 거대

기금 설립해 대학원생 지원

명예교수 돼서도 제자와 토론

그는 98년 퇴임할 때까지 워싱턴대에 재직했다. 명예교수가 된 뒤에도 버켄스탁 샌들에 청바지 차림으로 거의 매일 대학 킨케이드 홀 지하 연구실에 나가 글을 쓰거나 제자들과 토론하며 조언했다. ‘마카 연구실(그들은 마카 만을 그렇게 불렀다)’실험 당시에도 저녁이면 다들 모닥불 가에 둘러 앉아 토론하며 수업 아닌 수업을 진행하곤 했다고 그의 제자 티모시 우턴(시카고대 교수) 교수는 전했다. 페인은 제자들을 동료로 대하며 지시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자신이 연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지 않은 한 제자의 논문에 자기 이름을 넣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scientificamerican.com, 13.1.16) 역시 제자인 UCLA 교수 피터 커레이버(Peter kareiva)는 “그가 거든 논문에 모두 이름을 넣었다면 그의 논문 수는 지금보다 10배가 넘을 것”이라고, “만일 밥(애칭)이 다시 태어나 지금 주니어 학자로 일했다면, 물론 탁월한 대학원생이었겠지만, 얼마나 큰 보상을 받았을지 미지수”라고 말했다.

페인은 2000년 ‘현장 실험 생태학 기금 Experimental and Field Ecology Fund’을 설립, 지금까지 30여 명의 석ㆍ박사 과정 학생에게 연구 자금을 제공해왔다. 그가 80세 되던 2010년 제자들은 기금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2013년 워싱턴대 학회지 인터뷰에서 그는 “나도 국립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했고, 늘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왔다. 그들은 내 성공의 일부이고, 나는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늘 품고 있다. 기금은 그들이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 해 ‘애틀랜틱저널’은 그가 “내 학생들은, 단지 아는 게 나보다 적을 뿐 모두 나보다 영리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앞서 언급한‘네이처’의 2013년 기사는 ‘페인 학파’의 우람한 계보도와 함께 그 배경을 소개한 글이었다. 네이처는 ‘과학의 왕조(scientific dynasties)’는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의 왕조는 (자리나 챙겨주는 학맥이 아니라) 연구 방식과 철학의 멘토십으로 묶인 패밀리라고 썼다.

페인은 현장(field work)을 중시했고, 과학자 개개인의 창의적 헌신을 높이 평가했다. 그게 ‘페인 스타일’이었다. 연구소들이 팀을 짜서 진행하는 거대 프로젝트, 이른바 ‘빅 사이언스’를 그는 불신하고 못마땅해했다. 알래스카에서 멕시코에 이르는 1,900km 해양 생태계와 수질 수온 등을 조사하기 위해 13개 연구소가 뭉친 1999년의 ‘대양 연안 학제간 연구 파트너십ㆍPISCO’프로젝트를 두고도 그는 “구체적인 통찰보다는 방대하고 불분명한 경향만 보여줄 것”이고 “젊은 연구자들의 창의적인 역량을 소진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워싱턴대 제자로 97년 미국 과학진흥회(AAAS) 회장을 지낸 해양생태학자 제인 루브첸코(Jane Lubchenco) 등이 거기 가담했다. 루브첸코는 “지구 온난화부터 해양 산성화 등 새로운 생태학적 도전들은 단독 실험의 리듬으로 쫓아가기엔 한계가 있다”고, “(스승에 대한 반역은 무척 고통스럽지만) 인류는 그들의 부모세대를 거스르며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scientificamerican, 위 기사)

그것과는 무관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Biodiverse Perspective’ 인터뷰에서 페인은 자연생태와 관련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인구 증가와 기후 변화 등-를 언급한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정치인을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나는 그게 과학자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청중들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국립연구회의(NRC) 같은 곳과도 일할 수 있어야 하고, 나도 꽤 했다.”

1995년 페인은 25년간 추방시켰던 불가사리들을 섬 조간대에 되돌려놓기 시작했다. 그는 숨을 거두기 몇 년 전까지 타투시 섬을, 약해진 시력과 둔한 발걸음에도 불구하고, 정기적으로 들르곤 했다. 2013년 그는 “(딸과 제자들의 부축이 시원찮긴 하지만) 아직은 내 장기 실험의 추이를 추적할 수 있다”고, “내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불가사리가 돌아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는 데까지) 지켜보자”고 말했다. 그 연구는 우턴과 시카고대 동료인 우턴의 아내 케이시 피스터(Cathy Pfister) 교수가 맡고 있다. 네이처는 “불가사리들이 늘어나면서 홍합들이 다시 영토를 잃고 있고, 해안은 페인이 개입하기 이전 상태로 복원되고 있다. 하지만 생태적으로 똑같아졌다고 말할 순 없다. ‘페인 이후’가 결코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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