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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위기 후에 무엇이 왔나 – 외환위기 20년

입력
2017.11.26 14:23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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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이맘때 추위는 그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외부로부터 구제금융이 없이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된 무력감은 사회전체를 압도하였다. 사회 초년병 딱지를 뗄 무렵, IMF 실사단에 제출할 서류뭉치를 들고 남산 어귀의 호텔로 내달리던 그 새벽의 공기는 단순한 차가움 이상이었다.

2001년 8월, 불과 4년여 남짓 만에 우리는 IMF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대출프로그램을 졸업한 나라로 기록을 남긴다. 차입금의 마지막 상환분을 보내는 서류결재를 앞두고 당시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는 서명을 위해 국산만년필을 고집했다. 그간 온 나라가 겪었던 힘든 시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재를 지켜보는 내내 감격스러웠다.

위기 이후 우리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 외환위기가 남긴 것은 기회로서의 명(明)과 상처로서의 암(暗) 모두였다. 긍정적 영향으로 경제체질의 개선과 사회전반의 투명성 향상을 들 수 있다. 부채비율은 눈에 띄게 줄었고 주식시장을 통한 자본조달이 늘었다. 폐쇄적이고 불투명한 의사결정구조와 온정주의가 위기의 원인 중 하나였다는 반성은 투명성 제고를 제도개선의 주요과제로 삼게 하였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도 큰 의미가 있다. 직장을 잃은 남편을 대신하여 많은 여성들이 취업에 나섰다. 당시는 단순일용직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양질의 전문영역으로 여성의 진출이 확대되고 있다.

상처도 깊었다. 대표적인 것이 양극화다. 폭락하는 자산가격은 어떤 이에게는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업의 연쇄도산으로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되었으며, 중산층은 무너졌고 계층은 고착화되었다. 비정규직 문제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고용의 불안과 함께 정규직과의 임금차별은 여전히 양극화를 지속시키는 한 원인이 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사회적 연대감이 사라진 것이다. 극한의 생존의 위협을 경험한 사람들은 방어본능이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공동체적 가치보다 각자의 생존을 위한 준비에 집중하였다. 경제적 어려움은 돈이 최고라는 믿음을 공고히 하였고, 이해의 충돌에서는 밀리면 죽는다는 강박을 낳았다. 공정하지 않더라도 이기거나 얻을 수 있다면 큰 문제의식을 갖지 않기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양극화를 해소하고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며, 또 다른 하나는 다시 올 수 있는 위기에 대비하는 것이다. 양극화 해소에는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그 전제로 건전한 부의 축적은 존중하되, 사회적 약자의 아픔은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인식이 정립되어야 한다. 정치권도 양극단의 문제를 정치적 정체성의 기초로 이용하는 것을 자제할 필요가 있으며, 성숙한 시민들이 숙의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데 노력해야 한다.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중국이라는 추격자에 비해 우리가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디지털혁명시대에 중국의 기세는 맹렬하고 일본은 정교해지고 있다. 여기에 국내적으로 가계부채는 임계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경제구조는 물론이며 교육 등 사회구조 전반의 개선이 필요한 일이다.

외환위기가 그랬듯이 위기는 변화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자발적 의지와 계획에 의하지 않은 타율적인 급격한 변화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부작용을 야기한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경제구조로 인해 일상이 위기일 수 있는 우리에게 그래서 지난 20년의 경험은 소중하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주는 경험을 통해 해야 할 것들을 발견해 나가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잊지 않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때이다.

최승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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