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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트럼프 시대의 블루스

입력
2017.01.20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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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네이처 지는 2017년 과학계를 전망하는 기사에서 두 번째 꼭지로 올 3월부터 시작되는 영국의 브렉시트 협상과 4월 프랑스 대선, 10월 독일 총선을 꼽았다. 이들 결과에 따라 유럽 과학자들의 연구 환경이 크게 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꼽은 항목은 트럼프 대통령 시대의 개막이었다. 과학전문지가 한 해를 전망하면서 북미와 유럽 대륙의 정치적 상황을 1, 2위로 꼽은 것이 흥미롭다. 트럼프는 기후변화가 사기라는 말까지 했다. 트럼프가 공언한 대로 미국이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다면 협약 자체가 무효화할 수도 있는 만큼 기후 변화에 대처하려는 세계의 노력을 헛되이 할지 모른다. 트럼프 행정부의 면면을 보면 그의 호언장담이 말로만 그칠 것 같지 않다.

에너지 및 기후협약 문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국무부, 내무부, 에너지부, 환경보호청 인선만 봐도 그렇다. 국무장관인 렉스 틸러슨은 석유 거물로 불리는 엑손 모빌 최고경영자이다. 내무장관 라이언 징크는 셰일가스 개발론자로서 기후변화에 회의적 입장을 보인 바 있다. 에너지장관 릭 페리 전 텍사스 주지사는 2012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 에너지부를 없애겠다고 했던 사람이다. 환경보호청장 스콧 프루이트는 오바마의 환경규제를 반대하는 운동의 선봉에 서서 환경보호청과 소송까지 불사하며 싸워온 인물이다. 이들 모두 기후변화 회의론자이거나 화석 에너지 개발과 확대를 옹호해 온 사람들이라, 트럼프 행정부는 확실히 파리기후협약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백신 회의론자인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가 신설되는 백신안전위원회를 맡을 전망이다.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는 인간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환경부에서 환경파괴를 묵인하고 노동부에서 재벌입장만 강변하던, 그리고 과학기술부와 정보통신부가 아예 사라진 우리네 상황이 묘하게 겹쳐진다.

미국과학진흥협회장인 러시 홀트는 이번 미 대선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선거는 정치기득권(political establishment)을 거부한 선거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정사실(established facts)까지 거부하도록 내버려둘 순 없습니다.” 트럼프 시대를 맞이하는 과학자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기정사실까지 거부된 시대가 어떤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쿠데타를 쿠데타라 부르지 못했고, 건국절 논란과 함께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임시정부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다. 기정사실을 뒤집기 위한 몸부림은 국정교과서로까지 이어졌다. 앞으로 끔찍한 날들을 맞이하게 될 미국인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전문직 취업비자(H-1B)를 억제하는 이민법을 추진 중이어서 미국은 고급인력 수급에도 차질이 생길 것 같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인 미치오 카쿠는 예전에 이런 말을 했다. “미국에는 비밀병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H-1B입니다. H-1B가 없다면 이 나라의 과학기반은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구글은 잊으세요. 실리콘 밸리도 잊으세요. H-1B가 없으면 실리콘 밸리도 없습니다.”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던 요인 중에는 개방성과 민주성을 빼놓을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악인 이유는 문제해결의 방법론조차 과학적 방법론과는 정반대로 작동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 유권자들이 이민자와 유색인종과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고 공격했던 트럼프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문명인으로서의 지성보다 호모 사피엔스 속에 깃든 야만의 정서가 우세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이비 교주일가에게 나라를 완전히 넘겨버리다시피 한 우리 입장에서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다. 올해 중요한 정치일정을 앞두고 있기는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정유년 새해, 야만과 문명의 갈림길이 다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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