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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팔할은] "그녀의 삶으로 비평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

입력
2017.03.25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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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이자 작가 정여울. '공부할 권리',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등을 썼다.
평론가이자 작가 정여울. '공부할 권리',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내가 사랑한 유럽top10' 등을 썼다.

예술은 의식주를 비롯한 여러 가지 기본적 욕구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고차원의 자유일까.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처럼,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 및 애정의 욕구, 자존과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다 실현된 다음에야 느끼는 것이 예술을 향한 감동의 욕구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이 욕구단계이론에는 예술을 통한 자기표현의 욕구가 명시되어 있지도 않다. 의식주, 안전, 애정, 존중, 자아실현 등 인간의 모든 욕구는 소중하지만, 이렇게 단계별로 나뉘어져 그래프로 중요도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욕구들 사이에는 수많은 교집합이 있고, 때로는 어느 것이 상위이고 어느 것이 하위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나는 우리 존재의 가장 밑바닥에 예술을 향한 열망이 물처럼, 공기처럼, 흙처럼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의식주가 위협 당할수록, 평화로운 삶이 위협 당할수록, 가장 원초적인 자존감이 위협 받을수록, 예술에 대한 욕구는 오히려 커졌기 때문이다.

내 이런 생각의 뿌리를 더듬다 보니 이런 나의 감수성에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사람은 미국의 평론가이자 작가인 수전 손택이었다. 수전 손택의 글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비평가가 되지 않았을 것 같다. 또한 손택이 아니었다면 비평가에서 작가로 변신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도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손택에게 ‘비평가로서의 평론’과 ‘작가로서의 창조적 글쓰기’는 그렇게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비평가에서 소설가로, 에세이스트에서 연극연출가로 종횡무진의 활동을 펼쳤지만, 그 어느 하나도 갑작스럽거나 이질적인 행보는 아니었다. 그녀에겐 그 모든 글쓰기와 사회적 실천이 공작새의 찬란한 무지갯빛 날개처럼 하나의 몸에서 우러나온 여러 개의 변화무쌍한 스펙트럼이었다.

누군가의 영향력이 진짜 빛을 발휘할 때는 ‘삶이 정말 힘겹다’고 느낄 때다. 시도 소설도 아닌 평론을 쓰고 있자니 부모님의 반대가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내가 평론을 시작했을 때 가장 싫어하신 분들은 부모님이셨고, 주변 사람들은 “그래서 너는 이 다음에 뭘 할 건데?”라고 묻곤 했다. ‘설마 평론을 계속 할 생각은 아니지?’하는 공격적인 암시가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바로 그때 ‘나는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할까’라는 고민을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옳은 것일까’로 바꾸어 준 사람, 그가 바로 손택이었다.

그녀의 비평 자체가 곧 창작이었고, 그녀의 비평 자체가 곧 타인의 삶에 참여하는 길이었으며, 그녀의 비평 자체가 그녀의 삶과 떼어낼 수 없는 실천이었다. 손택은 죽는 순간까지 평론가였지만 평론의 프리즘을 통해 그녀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해냈다. 그녀는 평론의 대상을 세상 전체로 확장시킴으로써, 평론의 형식을 곧 창작의 형식으로 전환함으로써, 더 이상 텍스트에 기생하지 않는 평론의 장을 열었다. 그녀를 알게 된 후 나는 내 한계를 똑바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비평의 기생성은 비평 자체의 무능이 아니라 존재의 무능일 뿐이라는 것을. 내가 우울한 것은 비평 때문이 아니라 비평을 통해 세상에 뜨겁게 참여하지 못하는 이 새가슴, 소심증 때문이라는 것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다.”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일상보다 드높은 곳에서 예술의 가치를 찾지 않았다. 그녀는 예술을 사랑함으로써 삶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끊임없이 탐색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품의 의미를 쥐어짜내는 분석이 아니라 작품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예민한 후각, 청각, 시각, 미각, 촉각을 갖는 것이며, 작품 속 인물의 고통을 곧바로 내 것으로 아파할 수 있는 통각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비평이란 타인의 슬픔에 참여할 수 있는 실천적 힘이었다.

1993년 당시 손택은 전쟁의 총성과 폐허로 얼룩진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했다. 사라예보 바깥에서 전쟁을 관망하던 사람들은 그녀가 목숨을 걸고 사라예보까지 달려가 ‘그토록 우울한’ 연극을 연출하는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배우들과 관객들이 극장을 오가다 폭격을 맞거나 저격수에게 총격을 당해 죽을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모두 현실도피적인 오락물만을 원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라고.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라예보 사람들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예술로 변형하고 확인하는 것에서 오히려 힘과 위안을 얻는다고.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뜨겁게 확인하는 길은, 우리가 단지 먹고 입고 자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길은, 바로 ‘예술’을 사랑하고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는 일이 아닐까. 사라예보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바로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이었으며, 그 존엄성을 회복하는 길은 폭격 소리가 울려 퍼지는 전쟁터에서도, 여전히 고도를 기다리는 희망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그녀의 비평은 세상에 대한 사랑이었고 타인의 고통을 향한 울음이었으며 그 고통을 낳은 자들을 향한 끝나지 않는 전투였다.

단지 작가가 되거나 무슨 직업을 갖는 것이 꿈이 아니라, 세상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싶은 꿈, 내게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이 세상과 사랑에 빠지는 데 쓰고 싶다는 당찬 꿈을 갖게 도와준 사람. 그가 바로 손택이다.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감동할 권리, 이 세상의 수많은 아름다움을 느낄 권리, 내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이 세계가 선물하는 최고의 가치를 누릴 권리. 그것은 삶이 힘겨울수록 더욱 절절히 목말라지는, 원초적인 열망이다. 예술을 향한 욕구가 진정으로 충족되면, 사랑 받고 싶은 열망, 인정 받고 싶은 열망, 자존감을 되찾고 싶은 열망 모두가 한꺼번에 실현되는 기적 같은 감동이 일어나니까.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감수성을 다 쓰고 남김없이 내 에너지를 불태우고 살다 갔으면 좋겠다. 예술에 대한 사랑,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사랑이 나도 모르게 넘쳐나서, 그 사랑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풍요롭고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다. 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권리, 자신의 숨은 재능을 끌어내어 세상 밖으로 표출할 권리, 진정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글을 쓸 권리를 지키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가로막는 세상과 싸울 것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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