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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덕 칼럼] 국민이라는 이름

입력
2016.06.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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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박 대통령의 제20대 국회 개원연설에서 특히 눈에 띤 것은 ‘국민’과 ‘경제’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였다. 일부 언론도 보도했듯이, 이례적일 만큼 국민과 경제는 연설문에서 많이 언급되었다. 30분가량의 연설 중 국민이 34번, 경제가 29번 나왔다. 이 수많은 반복을 통해, 연설문은 마치 국민 전체가 하나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현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가 그 전체에 이익이 된다는 메시지도 전달했다. 그렇기에 국회는 정부의 의지를 쫓아 경제 관련 법안 처리에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정부의 특정 경제정책이 국민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화법은 이번 연설에서 더 두드러지긴 했지만, 현 정부를 비롯해 그간의 정부들 또는 정치인들이 오랫동안 활용해온 것이기도 하다. 이런 화법의 문제는 국민이 하나의 경제적 범주로 묶이기 어려운 개념이라는 점을 외면한다는 점이다. 역사를 볼 때, 국민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일견, 국민은 한 나라의 일원이라는 뜻에서 과거 세계의 모든 문명에 존재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서양 문명의 특정 시대에 만들어진 매우 특수한 개념이다. 국민이라는 용어는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국’과 ‘민’은 있었지만, ‘국민’은 없었다. 이는 서양 언어권의 nation을 동아시아 최초의 서양문물 수입자인 일본의 메이지 지식인들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든 조어이다. 여기서 국민은 단순히 한 나라의 일원이라는 의미 이상이다. 그 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국민국가 형태를 갖추어야 하고, 그 구성원은 신분제에 의해 법적 차별을 받지 않는 평등한 존재여야 한다.

이런 국민은 근대 초 유럽인들이 절대 왕정과 신분제를 타파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어원은 멀리 고대 로마로까지 추적할 수 있지만, 국민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영국 내전 중의 일이었다. 당시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절대 권력에 맞섰던 의회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네이션이라 칭했을 때, 이 단어는 군주에 대항하는 정치 집단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한 세기 반 이후 프랑스 혁명 시기에 이르러 네이션은 일부 정치 지도자들을 넘어, 국왕의 절대 권력에 맞서는 나라의 모든 구성원으로 그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짐은 곧 국가다’라며 나라의 주권을 개인의 것으로 생각한 군주에 반대해, 그 주권이 국가 소속원 모두에 있다는 주장을 펼친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정치주체, 즉 국민의 탄생을 알렸다. 이제 주권 소유자의 하나로 국민은 서로 동등한 정치 권리를 가질 터였고, 그들 사이에 신분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근대 유럽의 정치 변동이 하나의 통합적 정치주체인 국민을 만들어냈다면, 그와 동시대에 진행된 자본주의의 확대 및 심화는 반대로 과거보다 더 다양한 경제주체들을 주조했다. 유럽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며 대체로 균일한 삶을 살던 소농들은 자본주의의 영향 속에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로 변모했다. 소수에 불과하던 도시민들 숫자도 폭증해서 관리자, 노동자, 전문직 종사자 등의 여러 직업군으로 분산되었다. 그 직업군 내에서도 업종, 직장 규모, 위치에 따라, 그리고 심지어 같은 직장이라 해도 성별, 나이, 경력에 따라 적지 않은 이해관계 차이가 발생했다. 이를테면, 과거 농민공동체 소속으로 함께 땅을 갈던 유년과 노년의 농민은 이제는 각각 청년과 기성세대에 속한 취업자로 서로 다른 경제적 입장을 갖게 된 것이다. 기업가들도 분화하면서, 거대 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자영업자의 간극은 더욱 넓어졌다. 이렇듯, 정치 영역과는 달리, 경제 영역에서의 국민은 계급, 계층, 성별, 지역, 세대 등에 따라 그 이해관계가 잘게 나뉘고 복잡하게 얽힌 경제주체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절대왕정과 신분제에 대항해 탄생한 국민은 정치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그들은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없었다. 따라서 근대 국가의 경제정책은 국민에게 균일한 영향을 끼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편향성을 띠게 마련이다. 근대 의회민주주의 체제에서 각기의 경제 강령을 가진 여러 정당이 존재하는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박 대통령의 국회 개원연설은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현 정부와 여당의 경제정책 기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노동법, 규제파괴, 신산업 육성 등은 총선 전 정부의 입장 그대로다. 이들 정책은 연설문 속 ‘국민’의 수많은 반복이 만들어낸 이미지와는 달리, 전체 국민 지향적이라기보다는 특정 집단 또는 계급 편향적인 성격이 크다. 정책들이 편향적일수록 더 신중하고 다각도의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이 필요성은 지난 총선 결과가 일러주기도 했다. 전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정책의 편향성을 가리려는 모습은 ‘국민’의 민의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총선 직후 대통령의 담화내용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광주과학기술원 교수ㆍ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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