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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완성하지 못한 우리의 이야기, 2016년

입력
2016.12.2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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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 혹은 단어가 특별한 의미로 와 닿을 때가 있다. 나에게는 우리말로 ‘시한 혹은 마감기한’을 뜻하는 영어단어 ‘데드라인(deadline)’이 그중 하나였다.

첫 직장에 첫 출근을 하던 날. 사무실 한 면에 커다란 글씨로 붙여놓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Deadline은 死線이다.’ 매주 원고 마감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잡지사였다. 후배 기자들을 족쳐야 할 어느 데스크가 이 절묘한 문장을 떠올렸겠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그의 심정이 이해됐다.

머리 쥐어짜며 저 문장을 만들어내고 손수 공들여 벽면에 붙였을 그이의 의도는 적어도 나에게는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선홍색으로 강조해놓은 ‘Deadline’이라는 글자는 볼 때마다 섬뜩함을 자아냈다. 죽음의 선이라니. 서양 사람들의 시간 강박이랄까, 즉물적인 세계관이 저 단어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자못 호기도 부려 보았으나 그걸로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배포 큰 동료들은 그깟 문장이야 벽에 걸린 족자쯤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였다. 편집부에서 원고를 재촉하든 말든 신경 줄에 주리를 틀고도 남을 욕설이 부장의 입에서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든 말든 대다수 동료는 의연했건만, 하필 고개만 들면 그 문구가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를 배정받았던 나는, 마감기한을 따박따박 지켜내는 거로 지워지지 않는 불편함을 덜어보려 애썼다.

기사를 쓰다가 고개 들어 그 단어와 마주치면 종종 아연한 기분에 빠지기도 했다. 원고 마감시한이야 그때그때 지키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문자 그대로의 데드라인, 즉 생의 마감시한이 내 앞에 주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남은 시간을 살뜰히 채우려 분투할까, 아니면 체념하고 분노하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데드라인에 순응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릴 때 읽은 동화 ‘천일야화’ 속의 여인 셰에라자드가 저절로 떠올랐다.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 앞에 놓인 데드라인을 무력화시켰던 사람. 원한에 눈멀어 죽음의 사자가 되어버린 세리자르 왕 앞으로 나아갔을 때, 어린 그녀에게 주어진 생의 시한은 단 하룻밤이었다. 얼마나 두렵고 당혹스러웠을까.

그런데 이 빠듯하고 위태로운 시간을 셰에라자드는 이야기로 채워나갔다. 배신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얼음처럼 차가워진 왕 셰리자르마저 단번에 매혹당할 이야기. 비단 실처럼 풀려 나오는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는 밤이 깊고 날이 새도록 끝나지 않았고, 왕은 자신이 정한 처형 규칙을 지킬 수 없었다. 결말이 나지 않은 이야기를 그대로 놔둔 채 그녀를 죽여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혜로운 셰에라자드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모험담과 사랑 이야기와 우화를 기막히게 조합하고 배분했다. 왕의 분노를 잠재워줄 이야기, 고통에 처한 스스로를 위로할 이야기, 피폐해진 생을 북돋우고 다시금 꿈을 꾸도록 독려할 이야기…. 그녀는 천일 하고도 하룻밤을 그렇게 버텨냈다. 그리고 계속 연기되는 처형 시한을 무력화하며 게임의 승자가 되었을 때, 아름다운 여인 셰에라자드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화자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바꾼 모험담의 걸출한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2016년이 일주일 남았다. 물리적으로 구획된 한 해를 다시 마감해야 하는 시간. 수많은 일을 난삽하게 부려놓고 저 혼자 내빼는 시간을 보며 농락당한 기분이 드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늪 같은 상황이 훗날의 예술가에게는 어디서도 만나기 힘든 이야깃거리가 되겠지. 어쩌면 탁월한 정신분석가와 역사학자에게 2016년을 살았던 우리 모두는 참으로 흥미롭고 입체적인 분석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인다. 제멋대로 부려진 2016년을 우리들 각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로 수렴해내기 전에 올해의 달력과 기억을 고이 접어 과거로 보내도 되는 걸까.

미안하지만, 2016년의 데드라인은 제대로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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