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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연기" vs "극강 비주얼" vs "통찰 없는 겉멋"

입력
2016.08.2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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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정'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혼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립과 교류를 그려낸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밀정'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혼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립과 교류를 그려낸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송강호와 공유가 출연하고 이병헌이 등장한다. 수려한 화면이 인상적인 ‘장화 홍련’(2003)과 ‘달콤한 인생’(2005),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악마를 보았다’(2010) 등으로 충무로에 자신만의 인장을 찍어왔던 김지운 감독의 충무로 복귀작이다. 김 감독은 ‘라스트 스탠딩’(2013)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뒤 돌아왔다. 제작비는 약 100억원.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인 워너브러더스 픽쳐스가 돈을 댔다. 면면만으로도 화려하다. 추석 대목 가장 주목 받는 영화로 꼽히는 ‘밀정’이 25일 오후에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첫 공개됐다.

영화의 배경은 1920년대. 일제의 식민 통치가 뿌리 내린 시기다. 일제는 조선인 출신 경찰을 앞세워 경성에 잠입한 독립군을 잡으려 하고, 독립군은 골동품을 밀매해 군자금을 확보하려 한다. 억압적이고도 혼돈이 깃든 시기. 한때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일을 도왔던 이정출(송강호)은 일제의 앞잡이가 돼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뒤를 캔다. 의열단의 젊은 간부 김우진(공유)은 이정출을 역이용해 일제의 촘촘한 체포망을 뚫으려 한다.

우진이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에서 폭탄을 경성으로 운반해 무장 활동을 계획하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롤러코스터 궤도에 오른다. 조선인 출신으로 출세에 눈이 먼 하시모토(엄태구)가 정출을 견제하고 경계하며 우진 일행의 뒤를 쫓으면서 서스펜스와 스릴이 스크린을 채운다. “(조선은)이미 기울어진 배”라는 현실론을 주창하던 이정출은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섭다”며 일제와 의열단에 양다리를 걸치고 긴장감은 증폭된다.

★다섯 개 만점 기준, ☆는 반 개.

또 다시 ‘연기 괴물’을 보았다

나라는 없고, 어른도 없다. 지도층은 나라를 팔아 돈을 벌고 백성은 다른 백성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엄혹한 시절이다. ‘밀정’의 인물들은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서로가 미끼를 던지거나 미끼가 되어 인간 관계를 형성하면서도 독립을 열망했던, 비정하고도 뜨거운 역사가 김지운 감독 특유의 스타일로 재현된다. 기와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독립군을 쫓는 일본군의 모습, 망국의 설움과 신문물에 대한 동경이 뒤섞인 20세기 초반 경성의 이국적인 풍광, 사람들의 죽음조차 낭만으로 변질시키는 호사로운 액션 등이 눈길을 붙든다. 볼거리에서는 올해 선보인 어느 한국영화에도 뒤지지 않는다.

김 감독이 펼쳐놓은 스타일리시한 미장셴 위에서 ‘연기 괴물’ 송강호가 펄떡인다. 그가 맡은 정출은 순수와 위선과 음흉이 뒤섞인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삶을 추동하는 힘이 돈인지, 권력인지, 아니면 단지 살아남기 위한 본능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시대가 매설해 놓은 갖은 고난을 동물적으로 헤쳐 나간다. 상대의 본심과 독립군의 정보를 알기 위해 윽박지르면서도 때론 능청스럽게, 때론 무정하게, 때론 살갑게 행동하는 모순된 모습이 기이하게도 흡입력을 발휘한다.

김 감독의 전작들 대부분이 그렇듯 ‘밀정’의 정서적 설득력은 약하다. 사람의 감정 변화가 사건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나 등장인물의 변심에 쉬 동의할 수 없다. 송강호가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의 약점을 메운다. 정출과 우진이 첫 대면을 하며 서로의 속내를 숨기고 상대를 살피는 장면, 채산과 정출의 황망한 조우 등은 인화성 강한 송강호와 화기 어린 공유, 이병헌이 만나며 뜨겁게 타오른다. 배우들의 열연과 세공술이 빛나는 화면만으로도 상업영화로서의 본분을 다한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오른쪽)은 자신보다 더 악질인 하시모토의 견제를 받으며 마음이 흔들린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오른쪽)은 자신보다 더 악질인 하시모토의 견제를 받으며 마음이 흔들린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김지운표’ 스타일이 세묘한 극단의 시대

‘극강의 비주얼’로 눈이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영화는 흔치 않다. ‘밀정’은 세밀한 시대 묘사에 목말라 있던 관객이라면 반길 영화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차분한 모노톤의 클래식한 분위기로 스크린에 채색해 동공을 확장시킨다. 둔탁한 총기, 땅바닥까지 내려오는 코트, 의열단 핵심세력 김장옥(박희순)이 신은 신발까지 어느 것 하나 시대를 관통하지 않는 소품이 없다.

완벽에 가깝게 복원된 배경은 친일과 항일의 경계에 섰던 인물 정출의 심리를 좇는 데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 시종일관 튀지 않는 색채로 분위기를 끌고 가는 모습은 ‘밀정’이 첩보영화가 아닌 심리극에 초점을 맞췄다는 증거다. ‘반칙왕’과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를 통해 보여줬던 김지운표 심리묘사가 ‘밀정’에도 반복되면서 극단의 시대를 대변한다.

영화는 정출이 우진에게 접근해 서로의 정체와 의도를 숨긴 채 적에서 친구로 변화하는 과정에서의 심리 변화를 밀도 높게 그려낸다. 의열단을 잡아내려 밀정을 자처하는 정출과 그를 이용해 상하이에서 경성까지 무사히 폭탄을 옮기려는 우진 사이의 심리적 혈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특히 친일파지만 미워할 수 없는, 고뇌하는 인물 정출을 연기한 송강호의 인간미는 스크린을 지탱하는 힘이기도 하다.

부와 명예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인가. 기로에 선 정출의 흔들리는 내면은 루이 암스트롱의 재즈 선율이 동반해 감정을 고조시킨다. 김 감독의 특장인 이미지의 극대화가 펼쳐진다.

그러나 2시간 20분의 러닝타임을 인간의 심리 변화에 의존하기엔 버거워 보인다. 100억원대의 블록버스터급 영화라는 기대감을 채우기엔 확실한 ‘한 방’이 없다. 의열단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이 없었다면 또 모를까, ‘밀정’의 스펙터클은 ‘암살’에 비해 밋밋하다.

그나마 긴장감을 조여주는 건 정출을 의심하며 의열단을 쫓는 하시모토다. 굵직한 음성과 표독스런 눈빛으로 스크린에 각인된 엄태구의 ‘발견’에 충무로가 깜짝 놀랄 듯하다. 카메오인줄 알았던 이병헌은 오히려 극의 중심이자 묵직한 존재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밀정’으로선 큰 손실이었을 듯.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밀정'은 1920년대 경성과 상하이를 배경으로 시대의 공기를 담는데 공을 들였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밀정'은 1920년대 경성과 상하이를 배경으로 시대의 공기를 담는데 공을 들였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시대에 대한 통찰 없이 겉만 번지르르

일제강점기 만주라는 시공간에서 한국형 서부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탄생시켰던 김 감독이 이번엔 1920년대 경성과 상하이를 스파이들이 암약하는 스릴과 낭만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영화 ‘밀정’은 한 마디로 김지운식 한국형 스파이 영화라 설명할 수 있겠다.

의열단에 접근했다가 도리어 이중첩자로 포섭된 정출을 구심점 삼아 영화는 양극단에 선 인물들의 심리전을 긴박하게 펼쳐낸다. 누가 믿을 만한 동지이고 누가 적의 밀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혼돈 속에,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정찰하고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는 시대적 숙명이 스크린에 비애감을 부여한다. 밀정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내부의 적은 누구인가, 두 가지 질문을 서두에 던져놓고 추리식으로 답을 밝혀가는 전개가 제법 흥미롭다.

하지만 이야기의 밀도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인물들의 서사와 관계를 개연성 있게 구축하지 못한 탓이다. 과거 임시정부에 몸담았으나 독립군을 쫓는 일본경찰로 변신하고 다시 의열단의 이중첩자가 되는 정출의 드라마틱한 변모를 “마음의 빚” 정도로만 설명할 뿐이니 감정에 깊이 이입하기 어렵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불빛의 흔들림에서 인간적 고뇌를 이미지적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밀정들의 변절 논리 역시 “이 나라는 이미 기울어진 배”라는 대사로 대강 훑고 지나가버린다.

시대의 격랑에 온몸으로 부딪힌 인물들인데도 그들의 감정에 설득되지 않는 건, 영화가 시대를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서구 냉전시대 배경의 스파이물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는데, 강대국 간의 체제 경쟁인 냉전시대와 약소국에 대한 일방적 착취와 폭압이었던 일제강점기를 병치해 놓은 출발점부터가 오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영화의 스타일리시한 만듦새와 달리 내용물의 무게는 새털처럼 가볍다.

의열단 단원이 일제에 의해 차례로 검거되는 모습이 풍경화처럼 스케치되고 그 위로 낭만적 재즈 음악이 흐를 때, 역설의 카타르시스보다는 난처하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던 건 지나친 경계심 탓이었을까.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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