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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구의 동시동심] 산골길

입력
2016.05.1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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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메산골 오솔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왼쪽 길로 갈까 오른쪽 길로 갈까 망설인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피란군’이라 했지만 군인들은 아니고 보통의 ‘피란민(避亂民)’이다. 이고 지고 오던 무거운 짐을 바위 밑에 잠시 내려놓고, 울고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면서 물을 마신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는 길인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이지만 어느 길이든 “자꾸 따라 가면은/집 있겠지” 하는 어렴풋한 희망을 품는다. 난리가 터진 세상을 피해 깊은 산골로 들어가는 도정에 생성된 평화와 고요가 한 폭의 그림으로 찍혀 있다.

‘산골길’은 권태응 동요ㆍ동시집 ‘산골마을’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산골마을’은 권태응이 한국동란이 터진 해 7월 “뜻하지 않은 20일 동안의 산중 피란 생활에서 얻은 작품” 40편을 “지은 순서대로”(‘머리말’) 적어놓은 육필 작품집이다. 1918년생인 권태응은 30년대 말 일본 스가모(巢鴨) 형무소에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고 폐결핵에 걸려 오랜 요양 생활을 해야 했다. 1947년 3월 노트에 적은 형태로 동요집 ‘송아지’를 처음 엮은 후 권태응은 1951년 타계할 때까지 ‘하늘과 바다’ ‘우리 동무’ ‘어린 나무꾼’ 등 여덟 권의 동요ㆍ동시집을 더 엮는다. 그런데 생전에 공식 출판된 것은 1948년 글벗집에서 나온 동요집 ‘감자꽃’에 실린 30편이 전부다.

‘산골마을’의 머리말 앞에는 “7월 4일 피란 ↔ 7월 23일 귀가”라고 피란 기간이 적혀 있고 “수양골”이란 피란지도 적혀 있다. 각 작품 말미에는 “7. 18 식전에, 누워서” “7. 22 夕暮” 등으로 창작한 때를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험난한 피란 생활로 지병이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매일 시를 부여잡고, 쓰고 다듬고 정리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산업화로 황폐화하기 전 우리 농촌의 자연과 풍속을 내부의 시선으로 잡아낸 뛰어난 풍물지이다. 리듬을 탄 순탄한 언어로 자연과 삶의 어우러짐을 노래한 한 편 한 편은 그의 목숨 한 조각 한 조각을 나눈 것과 다름없지만, 놀랍게도 잘 여물어 벌어진 알밤처럼 토실하고 건실하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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