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삶과 문화] 무대 아래 대기실 풍경

입력
2017.04.10 14:55
0 0

무대 위에 서는 모든 출연자는 짧은 순간의 공연을 위해 긴 대기 시간을 갖는다. 정상급의 출연자로 갈수록 대기 시간은 짧아진다. 그건 그 사람이 유명하거나 시간이 모자라서이기도 하지만 그 동안 그만큼 많은 대기 시간을 쌓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막 공연 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행사장의 공기도 몇 시간 전에 도착해서 많이 마시는 게 좋다. 행사장 마다 무대 위에 흐르는 느낌과 객석에서 원하는 것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라디오 주파수 맞추듯 조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음향 관계자들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느낀다. 행사장의 구조, 객석의 배치, 그날의 날씨 등에 따라 소리는 변화무쌍해지기에 많은 시간을 들여 그 공간과 친해지려고 애를 쓴다.

리허설이 끝나고 관객들이 입장하기 시작하면, 출연자들은 대기실에 머문다. 물론 행사장 마다 대기실의 형태는 다양하다. 메이크업까지 가능한 번듯한 대기실도 있고, 겨우 몸을 구겨 넣는 공간도 있고, 아니면 아예 객석 앞자리에 앉아서 대기하는 경우도 있다. 작은 규모의 행사일수록 대기실 없이 객석에서 무대로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장시간 경직된 자세로 있다가 목청과 몸을 풀지 못하고 그냥 올라가게 된다. 이런 저런 형태의 대기실에서 출연자들은 대기 시간을 저마다 다르게 활용한다. 나는 수년간 공연 활동을 하며 대기실 풍경을 유심히 관찰해 왔는데, 대기실에서의 모습과 무대 위의 모습 사이에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최근 참여했던 행사의 대기실에는 내 창작곡을 부를 가수, 뮤지컬 배우,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자가 있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국내 최고의 음대를 나오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외국의 학교에서 공부한 정상급 연주자였다. 그녀의 순서는 오프닝과 맨 마지막 두 번이었는데 대기하는 한 시간 반 동안 한 번도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계속 바이올린의 지판을 누르거나 손가락으로 악보를 튕기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아까 리허설을 보니 그녀는 악보를 거의 다 외우는 상태였다. 그녀의 엔딩 연주는 전율을 안겨주었다.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내 창작곡을 부를 가수는 리허설을 무난하게 끝냈다. 그리고 대기실에서 내내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내가 며칠 전 보내준 악보와 반주음악으로 얼마나 연습을 했으면 저렇게도 여유를 가질까?’ 나는 그가 해온 만반의 준비와 무대 앞에서의 여유가 부러웠다. 그러나 정작 그의 순서가 되었을 때 노래의 핵심부분을 관객이 다 알 정도로 틀려버렸다. 2주간 밤을 새며 만든 노래는 빛을 보지 못하고 엉망이 되었다. 옆에 있던 뮤지컬 배우 역시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더러는 긴장을 푸는 방법으로 활용하기도 한다지만 무대와 객석을 생각하며 폭풍 같은 교감을 대기실에서부터 미리 일으키는 시간으로 활용할 수는 없는 걸까.

내가 봤던 가장 최악의 출연자는 대기실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던 가수다. 무명이었지만 음반의 내용도, 노래 실력도 꽤 좋아서 앞으로 많은 활동을 같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대에서 진행자가 본인의 이름을 부르기 직전까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 생각을 접었다. 그녀는 헤어지면서 본인이 출연료가 꽤 비싼 사람이라고 자랑했다. 그 뒤 몇 년이 흘렀지만 그녀가 간절히 바라던 큰 무대로 나아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아니, 간절함은 아예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대기실에서 한가하지 않다. 우선, 행사 전체의 흐름을 보며 잘 되고 있는 것과 미흡한 점을 살핀다. 그것은 내 순서에서 만들어 낼 감동의 증폭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이어질 다른 행사에서 나의 가치를 높일 방법을 찾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번째 하는 일은 위에 말한 바이올린 연주자와 같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