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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포괄임금제 금지 공약에 더해

입력
2017.05.0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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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임금제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의 유산이다. 1997년 외환위기는 모든 산업현장에서 고용 유연화 정책을 관철하는 계기가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구조조정 정책은 임금, 고용량 등을 시장 여건의 변화에 맞춰 신축적으로 변동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제고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러한 임금, 고용량의 “유연한” 조정은 당연히 기업의 추가적 부담 없이 이뤄지는 걸 전제했다. 임금의 추가 부담 없이 근로시간을 자유롭게 연장할 수 있는 포괄임금제는 유연화 정책의 대표적 수단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IT 산업의 확산과 산업구조의 개편(제조업 → 서비스업)과 맞물려 포괄임금제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무렵 법원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정책의 법률적 전위(前衛)이자 동력원이었다. 법원은 판례를 통해 고용 유연화 정책을 뒷받침했다. 포괄임금제를 문제 삼는 근로자는 재판에서 번번이 패소했다. 그 결과 작업시간의 시작과 종료가 분명한 생산직 근로자가 아니라면, 포괄임금제를 실시하는 것이 전체 산업에서 일반화되었다(김홍영, “포괄임금약정의 성립 판단”, 월간 노동리뷰 2017년 2월호).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평범한 상인(商人)들의 행동 양태라는 점을 고려할 때, 기업에 포괄임금제는 저렴한 비용으로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법적 도구였다. 반면에 그로 인해 근로자는 초과 근로를 통해 발생하는 이윤을 적절히 분배 받지 못했다. 이는 기업과 근로자 사이의 소득 양극화를 초래했다. 법원은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2010년 무렵부터 포괄임금제를 엄격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해 대법원은 포괄임금제는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경우’만 허용된다고 판시했고(대법원 2010. 5. 13. 선고 2008다6052 판결), 작년에는 포괄임금 합의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포괄임금제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하며 그 성립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판결까지 내렸다(대법원 2016. 10. 13. 선고 2016도1060 판결).

이와 같이 판례가 변경되었음에도, 포괄임금제는 여전히 널리 쓰이고 있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이 펴낸 “사무직 근로시간 실태와 포괄임금제 개선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100명 이상 사업장의 41.3%가 포괄임금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사무직 근로자의 월 초과근로시간은 평균 13시간 6분인 것으로 나타났고, 초과근로수당을 받는 곳은 32.5%에 불과하다. 이는 주 40시간제를 택한 근로기준법과 포괄임금제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판례에 어긋나는 현실이다.

이러한 법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우리나라의 근로감독 제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부는 장시간 근로 현실을 타개하겠다는 구호를 외치지만, 실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근로감독 권한을 행사한 적은 없다. 근로감독 제도가 취약계층 근로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 방관의 피해자가 누구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용이 안정된 대기업의 생산직 근로자들은 노동조합을 이용해서 포괄임금제를 막거나 민사소송을 통해 추가 임금을 받아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중소기업 근로자나 비정규직들은 일한 만큼의 임금을 받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다.

지금 대부분의 대통령 후보가 포괄임금제 금지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와 함께 국가의 근로감독 기능 강화 방안 등 비정규직을 비롯한 취약계층 근로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를 고민해야 한다. 근대 사법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실체적 권리와 구제 절차가 서로 조응하지 못할 때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법전(法典)의 권리는 구두선에 머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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