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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당신 아기 안에 늑대 있다

입력
2017.07.28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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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덥고 업무 능률은 안 오르고. 산행이라도 하며 머리 식힐 요량으로 해지기 전에 사무실을 나섰다.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을 산 뒤 산등성이 초입에 있는 동네 골목으로 접어들다가 소스라쳤다.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저쪽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뚝 선 나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한동안 잊었던 공포가 온몸을 휘감으며 왼쪽 종아리와 어깨가 저릿저릿 쑤시기 시작했다.

오래 전 개한테 물렸던 기억. 초등학교 2학년 어느 아침이었다. 또래 친구랑 같이 학교에 가기 위해 그 집 대문으로 들어서다가 헛간 기둥에 묶여 있던 개와 눈이 마주쳤다. 어린 나이에도 한눈에 알아챘다. 끓어오르는 적의를 드러내며 번들거리던 눈동자는 내게 친숙한 그 메리의 눈빛이 아니었다. 개가 펄쩍 뛰어오르고 헐겁게 매여 있던 개줄이 풀리는 걸 보자마자 나는 돌아서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가망 없음을 뻔히 알면서 사력을 다하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절망적인 것인지, 그 짧은 순간 뼈저리게 깨달았다. 채 열 걸음도 못 가 개한테 왼쪽 종아리를 물린 나는 땅바닥에 고꾸라졌고 책가방을 메고 있던 왼쪽 어깻죽지에 개 이빨이 박힐 즈음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안방에서 아침 드시던 친구 아버지가 벼락같이 뛰쳐나와 작대기를 휘두르지 않았다면 그날 나는 목숨을 잃었을지 모른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후 악몽 같은 날이 이어졌다. 집으로 업혀와 응급 처지를 받은 뒤 한숨 자고 일어난 내게 가장 먼저 들려온 말은, 그 개를 가마솥에 넣어 삶고 있다는 비보였다. 이틀 쉬고 학교에 가보니 내 얘기가 친구들 사이에서 흥분을 자아내는 뉴스거리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상처를 보고 싶어 안달하는 아이, 돌려차기로 제압하면 되는데 그걸 못했다고 책망하는 아이, 얼마나 놀랐냐며 뚝뚝 눈물을 떨구는 아이…. 많이 창피하고 속상했지만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버틸 만했다. 아픈 몸으로 간신히 수업 마치고 십리길을 걸어 동네로 접어들었는데 조금 특이한 아줌마가 나를 불러 세웠다. “너 미친 개한티 물렸대메? 하이고 이걸 어쩐다냐. 미친 개한티 물린 사람은 멀쩡하던 정신도 헤까닥 돌아뻐린다는디.” 헤까닥 돌아서 내가 미친년이 된다고? 머리에 노랑꽃 꽂고 치맛자락 펄럭이면서 이 동네 저 동네 싸돌아 다니는 그 미친년? 인생 다 끝장난 듯 서러움이 폭발한 나는 엉엉 울며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광견병’이라는 낯선 용어를 써가며 우는 딸을 다독이셨다. 나를 물고 가마솥으로 직행한 그 불쌍한 개는 미쳤던 게 아니라고, 제 젖 물려 키우던 새끼 다섯 마리를 주인이 눈앞에서 개장수에게 팔아 넘기자 너무 화가 나서 사람이 전부 다 미워졌던 거라고. 그때 아버지의 얼굴에 맴돌던 불안을 예리하게 간파한 나는, 몸 속에 잠복해 있던 광견병 바이러스가 불시에 습격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오래도록 시달려야만 했다.

등산로 초입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몸서리를 치는데 어느 집에선가 ‘캉캉’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노려보던 개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고, 강아지 한 마리와 남자가 나타났다. “겁먹지 마세요. 우리 아기 착해요.” 남자의 웃음에 나는 미소로 답할 수 없었다. ‘누가 악하다고 했나? 당신 아기 안에 잠재한 야성이 무서운 거지.’ 개에 물려 다치는 사고가 매해 천여 건씩 발생하지만 정작 다수의 개 주인들은 자신의 ‘아기’가 한 순간 타인에게 얼마나 끔찍한 야수로 돌변할 수 있는지 모르는 듯하다. 심지어 자식처럼 끼고 살던 애완견에 물려 병원 신세를 진 사람만도 내 주변에 셋이나 되는데 말이다.

아무리 앙증맞은 애완견일지라도, 사람 치아보다 약한 이빨을 가진 개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제발 개를 개로 사랑해줬으면. 개들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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