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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 사전] 훅

입력
2016.04.19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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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체제나 조직, 혹은 개인의 성취가 단번에 무너지는 것을 묘사하는 의태어로, 예컨대 “정신 차리자 한 순간에 훅 간다”가 쓰인다. 이 말은 2월 말부터 새누리당 회의실 벽에 붙어 있었다. 그 밖에도 같은 벽에는 “국민이 갑이요 너희는 을이다” 등과 같은 말이 붙어 있었는데, 이것들은 새누리당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모집한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훅 갔다. 지난 번 대선에서 박근혜(이하 모든 사람 직책 생략)를 도와주었던 김종인과 이상돈은 이번에 각기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에서 선거를 지휘해서 승리했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진실’하지 못한 ‘배신자’인 유승민도 국회의원이 되었다. 한편, 삼성을 정면으로 비판했다가 국회의원 자리를 잃었던 노회찬은 다시 금배지를 달았다.

미리 고백하자면, 용산구에 사는 나는 지역구는 더민주당 후보 진영을 찍었고, 비례 대표는 10번대 중간 번호의 당을 찍었다. 진영 역시 진실하지 못한 배신자인데, 나는 다른 이유에서 진영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박근혜를 훅 가게 하기 위해서 그를 찍은 것이다.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이 아니라는 게 곧 밝혀졌다. 실제로 박근혜는 훅 가지 않은 것이다. 박근혜는 “민의가 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민의를 겸허히 받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책상을 내려치며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속으로 박근혜는 ‘민의를 받들’ 마음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박근혜가 진정으로 반성하면서 자기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또 평소에 늘 떠벌리던 말, 예컨대 ‘일하는 국회’ 운운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말을 여전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혁이라는 말로 위장한 채 ‘노동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겠다고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총선 다음날 술자리에서 박근혜는 결코 반성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 나왔고 모든 사람이 즉각 찬성했는데 결국 그 말이 맞았다.

박근혜를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나로서는 박근혜의 이러한 일관된 태도가 반갑고 고맙다. 박근혜가 이런 식으로 계속 나와 줘야만 다가올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 또 설령 정권 교체가 안되더라도 박근혜와는 아주 다른, 그리고 박근혜보다는 훨씬 나은, 그러니까 ‘합리적인 보수’ 이념을 내세우는 인물이 새누리당 당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박근혜에게 ‘엄지척’을 보낸다. 역시, 박근혜는 ‘용자’다. 앞으로도 박근혜는 자기 자신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이번 총선의 결과는 ‘보수 양당제’ 몰락의 시작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보수 3당’이 된 것은 아니고 그래 봤자 ‘보수 2.5당’ 내지는 ‘보수 2와 3분의 1당’이 된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제 균열이 가기 시작했으니, 보수-진보 구도로 정치판이 만들어지는 것은 결국 시간 문제일 따름이라고 기대해 본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야 3당은 20대 국회에서 세월호특별법 개정과 중·고교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전환 폐기를 위해 공조키로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둘 다 모두 시급하고 중요하지만 이것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선거법 개정이다. 이번 총선에서 민심이 확인된 것은 ‘교차 투표’ 내지는 ‘분할 투표’에 의해서다. 이것이 지속적, 제도적으로 가능하도록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 선거 때 가서는 안될테니까 바로 지금 해놔야 하는 것이다.

지역구 반 비례대표 반으로 해야 한다. 지역구 의원들이 반대한다면, 지역구 수는 놔두고 비례대표 수를 늘리면 된다. 이 정도는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 또, 국회의원 임기는 미국처럼 2년으로 해야 한다. 국민이 ‘갑’이 되는 유일한 순간인 선거는 자주 있을수록 좋다.

한국 정치판에 비유적인 지진이 일어나는 동안 일본에는 실제 지진이 일어났다. 지진 피해로 고통 받는 일본 국민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빨리 피해를 복구하고 상처를 치유하기를 빈다. 그래서, 힘을 내서는, 대기업 위주 경제와 핵 발전소를 고집하고 있는 아베 정권을 다음 선거에서 훅 가게 만들기를 바란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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