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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인공지능 '알파 朴'의 패착

입력
2016.04.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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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인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 서울농학교 강당에 마련된 투표소를 찾아 투표를 하고 있다. 뉴시스
박근혜 대통령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인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 서울농학교 강당에 마련된 투표소를 찾아 투표를 하고 있다. 뉴시스

처음엔 ‘신의 한 수’라고 했다. 정권 심판론을 봉쇄하고 보수층을 결집시켜 선거의 여왕에게 다시 한 번 승리를 안길 절묘한 호착으로 보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총선 승부수였던 야당 심판론 말이다.

이기기 위한 최적의 수만을 찾아내도록 설계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에 빗대, 선거 승리를 향해 돌진한 박 대통령의 본능과 직관은 ‘알파박’이라 불릴 만 했다. 알파박은 방심해서 느슨한 수를 두는 법이 없었다. 위기를 맞아도 동요하지 않고 다음 착점에 임했다. 무엇보다 속을 알 수 없었다.

야당 심판론이 선거 초반 대세를 장악했을 때, 많은 사람이 승부가 끝났다고 단언했다. 알파박은 늘 이겼으므로. 여론조사 결과들도 알파박의 1승 추가를 점쳤다. 하지만 알파박은 끝내 참담하게 무너졌다. 그의 참모들은 고작 두 살인 알파고가 5,000년 된 인간 바둑을 제압한 순간만큼이나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알파박은 왜 치명적 버그(오류)를 냈을까.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프로그램 업데이트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알파박은 2012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뒤엔 민심을 읽고 눈높이를 맞추는 자기 학습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책상을 치며 호통치는 모습이 상징하는 그의 리더십은 2016년의 민심과 충돌했다.

알파박은 자신을 절대 강자로 만든 명령어 ‘자기 쇄신’을 삭제했다. 여의도 벌판에 천막 당사를 세우고, 경제민주화를 파격적으로 도입하고, 아버지의 과거를 사과한 프로그램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알파박은 대신 ‘배신자 심판’의 명령어를 입력했다. 하지만 민심이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알파박이 요구한 심판이 우리의 행복이 아닌, 자신의 권력 연장을 위한 것이라는 의심을 샀기 때문이다.

오만의 바이러스는 가장 치명적이었다. 알파박은 ‘콘크리트 지지층 + 야권의 분열과 무능 = 무조건 승리’라는 연산 착오를 저질렀다. 참모들은 “알파박의 정무적 행마는 당장은 이상해 보여도 몇 수를 지나고 나면 매번 옳은 것으로 판명났다”는 집단 착각에 빠져 진언을 포기했다. 막장 공천 싸움, 유승민 의원 찍어내기, 진박 마케팅 등 오작동이 거듭됐는데도 시스템에 경고 창이 뜨지 않았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과의 4국에서 ‘Resigns(물러난다)’라는 창을 띄워 돌을 던진 것처럼, 민심은 ‘알파박 심판의 표’를 무더기로 던졌다.

알파박은 위기에 유독 강했지만, 이번엔 한 동안 허둥거렸다. 총선 다음 날 청와대가 “선거 결과는 새로운 국회가 되라는 국민의 요구”라는 논평을 낸 것도, 선거 닷새 만에 박 대통령이 45초짜리 반성의 변을 낸 것도 엉뚱수였다. 패색이 짙어지면 아무 수나 내 끝내기를 서두르는 컴퓨터 바둑 프로그램을 연상시켰다.

박 대통령은 26일 언론사 편집ㆍ보도국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민심을 듣는다. 알파박이 드디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일까. 청와대 안에서 들리는 얘기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26일 행사 승낙을 받기까지 많은 사연이 있었다”“대통령이 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나는 바보 참모다”“청와대 밖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발 가감 없이 전해 달라….”

박 대통령이 알파박의 버그를 인정하지도, 수정을 결심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을 보좌했던 인사의 진단은 암울하다. “알파박은 쉽게 업데이트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아니다. 유년기와 청년기에 극적인 굴곡을 겪으며 만들어진 견고한 하드웨어다. 고치기 어렵다. 지금도 ‘이건 나의 게임이다. 내 방식대로 하고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이 들어맞는 결론은 오싹하다. 대한민국 호의 선장인 박 대통령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도 함께 추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알파박의 다음 착점이 소통과 변화이기를. 오류와 불통을 고백하고 사과하기를. 우리가 “수신 양호!”라는 사인을 보낼 때까지.

최문선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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