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편집국에서]‘청년에게 6개월도 못준다’는 국가

입력
2016.08.14 20:00
0 0

요즘 즐겨 보는 예능프로가 ‘나 혼자 산다’이다. 독신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다큐 형식의 예능물인데, 출연진 중 애정이 가는 이들이 있다. 자신의 길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들이다. 하지만 세상물정에 둔감하고, 처세도 서툴러 요즘 같은 취업난을 돌파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 보인다. 프로그램 초기에는 밴드 ‘장미여관’의 육중완이 이런 범주의 출연자이었다면, 요즘은 만화가 기안84가 그렇다.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는 만화가 기안84. MBC 제공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는 만화가 기안84. MBC 제공

최근 서울시가 추진하는 ‘청년수당’을 정부 여당이 못하게 막으며 논란이 일고 있다. 청년수당이란 서울시가 주당 30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저소득층 청년 3,000명을 뽑아 월 50만원씩 최장 6개월간 지원하는 제도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거나 취업 역량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대다수 청년을 좌절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는 ‘일하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서울시가 주는 50만원 받고 6개월간 빈둥거리는 걸 보면, 일하려는 젊은이들 의욕이 꺾일 것’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물고기를 줄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현 정부가 시행 중인 ‘청년취업성공패키지’(이하 패키지)와 중복시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서울시 청년수당이 시행되면, 누가 직업훈련을 받는 조건으로 수당을 주는 패키지를 신청하겠냐”고 따지는 것이다. 이 두 반대논리의 공통정서는 ‘요즘 젊은이들은 게으르다’이다.

이를 보며 육중완과 기안84가 떠올랐다. 과연 이 장관이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정책’이라고 자부하는 패키지가 ‘제2의 육중완, 기안84’가 대중가수와 만화가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패키지는 미취업 혹은 장기실업상태이거나 영세자영업을 하는 청년을 대상으로 ▦진단ㆍ경로 설정 ▦의욕ㆍ능력 증진(직업훈련) ▦취업알선의 3단계로 나눠 정부가 일일이 ‘보살펴’ 주면서 단계를 이수하는 걸 조건으로 수당을 지급한다.

하지만 대중음악가나 만화가 혹은 시나리오작가 같이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직업을 구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안 된다. 훈련기관을 안내하는 ‘직업포털 HRD-Net’을 검색해보니 작곡 연주 글쓰기 등을 가르쳐주는 과정이 하나도 없다. 만화 웹툰 실무자 양성과정은 몇 개 있지만 대부분 만화가가 그린 그림에 컴퓨터를 이용해 색을 입히는 과정이다. 제조 소프트웨어 등 다른 분야도 거의 단순 숙련을 쌓는 직업훈련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러 차례 “문화산업이 미래 성장동력이고, 청년 일자리 창출의 교두보”라고 강조하며 관심을 보이는 데 이리 문화산업을 푸대접하는 이유가 뭘까. 정부는 미래 성장동력이 무엇인지, 청년의 일자리가 어디서 창출될지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적성에 맞는 일자리 찾는 것이 절실한 청년들도 따라잡기 힘든 이 변화를, 이미 안정된 직업을 가진 고용노동부 관료가 더 먼저 감지할 수 있겠는가.

결국 과거 산업화 시절 만든 낡은 직업교육과정에 거액의 예산을 투입해 청년들의 귀중한 시간을 묶어두고, 시대에 뒤떨어진 직업을 강요하면서, 장관은 청년 취업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청와대에 보고했을 것이다.

패키지가 실패라는 것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국회예산처는 관련 예산이 매년 남아돌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원자가 매년 줄어들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잠시만 뒤져도 이 패키지 직업훈련이 얼마나 형식적이고 부실한지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를 수없이 찾을 수 있다.

청년들에게 실업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원한다면 정부는 더는 낡은 직업훈련소로 청년을 몰아넣으려 하지 말고, 제 나름대로 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여유 시간을 공급하라. 그게 바로 청년수당이고, 서울시에 정부까지 협조한다면 더 많은 젊은이가 취업준비 시간을 얻을 수 있다.

정영오 여론독자부장 young5@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