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낙 부총리 사퇴에도 진정 안 돼
시위 계속… 조기 총선 목소리 커져
정경 유착을 취재하던 기자(잔 쿠치악ㆍ27)가 살해된 사건이 슬로바키아 정권을 붕괴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2주째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면서 로베르트 피쏘 총리가 로베르트 칼리낙 부총리 겸 내무장관을 사퇴시켰지만, 내각 총 사퇴와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다.
13일 AFP통신에 따르면 칼리낙 부총리는 12일 “슬로바키아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전격 사퇴했다. 칼리낙 부총리는 피살된 탐사 전문 보도 기자 얀 쿠치악이 취재하던 사건과 연루된 인물로 퇴진 요구를 받아 왔다.
그러나 슬로바키아 시민들의 반감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반정부 시위 조직위원회는 “칼리낙 부총리의 사퇴는 시작일 뿐”이라며 “내각 전원을 비롯해 경찰수장도 물러나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AP통신은 “부총리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반정부 시위가 예정돼 있다”고 전했다.
집권 여당인 사회민주당(SMER-SD)의 연립 정부 파트너인 신헝가리계연합당(MOST-HID)도 등을 돌릴 태세다. 신헝가리계연합당의 벨라 부가르 대표는 이날 “조기 선거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며 “만약 사민당과 조기 선거에 관한 협상이 잘 이뤄지지 않으면 우리당은 연정에서 나갈 준비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들의 반정부 시위는 지난달 25일 쿠치악 기자의 피살 이후 철저한 수사를 요구하며 이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일에는 수만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AFP통신은 “4만명이 넘게 모였다”며 “1989년 벨벳혁명(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정권 붕괴를 불러온 시민혁명)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시위”라고 평가했다.
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전례 없는 언론인 피살 사건을 겪으면서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언론인의 죽음은 1993년 슬로바키아가 체코에서 분리 독립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전했다. 브라티슬라바에 사는 마리아 넴코바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일이 유럽연합(EU) 가입국 한 가운데에서 발생한 게 믿기지 않는다”며 “이틀 간 거의 잠을 못 잤다”고 말했다.
5월 결혼을 앞두고 있던 쿠치악은 지난달 25일 브라티슬라바 근처 자택에서 약혼녀와 함께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과 피쏘 정부 고위 관계자 간 결탁 관계를 취재하던 중 변을 당한 것이다. 반정부 시위 지지자는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언론인의 살인은 어느 사회에서나 용납될 수 없다”며 “우리는 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이 있으며, 공포에 의한 통치를 거부한다는 걸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EU에 가입한 슬로바키아는 막대한 해외 투자를 유치하면서 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하지만 한편으론 고성장에 따른 부패가 사회문제로 부각되어 왔다. 국제투명성기구의 최근 부패인식지수에 따르면 슬로바키아는 180개 조사 대상국 가운데 54위를 기록했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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