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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노동, 유연화보다 사회적 시민권을 먼저

입력
2017.03.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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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장의 유연화(flexibilization)는 일자리 정책과 관련해 오늘날 끊임없이 회자되는 논쟁거리다. 현재 일자리 문제의 원인으로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드는 이들은 유연성의 증진을 강조한다. 노동시장이 유연해야 더 많은 이들에게 고용기회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피가 같은 물건들일 경우, 딱딱하고 각이 진 것보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야 상자 안에 더 여러 개 담을 수 있다는 식이다.

노동을 유연화하는 다양한 방식 중에 한국에서는 유독 두 가지 조치가 강조되어 왔다. 하나는 비정규직의 자유로운 활용이다. 다른 하나는 해고의 자유로운 단행이다.

이는 최근까지 정부 정책의 중요한 화두였다. 전자의 예로 정부는 노동개혁을 이야기하면서, 파견근로의 사용에 대한 종전의 업종제한 규정을 완화시켜, 그것의 확대를 추진한 바 있다. 후자의 예로도 정규직일 경우 아무리 ‘저성과자’라고 해도 해고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현행 규정을 완화시켜, 이른바 ‘통상해고(일반해고)’를 도입하려던 정부의 정책을 들 수 있다.

잘 알다시피 20년 전 닥친 외환위기는 우리나라 노동시장 유연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90개조의 ‘고통분담’ 조치들을 담고 있던 노사정 사회협약에서 노동측이 감내해야 했던 결정적 조치는 바로 파견근로의 도입을 실행하되 제한하는 것, 그리고 정리해고를 가능케 하되 법제화해서 그 부작용을 줄이는 것 등이었다. 그 20년 후가 되어서도 지금 우리의 정책계는 계속해서 이 두 가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방안 모두 지금으로선 비판자 설득에 실패하여 시행되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이론적으로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전체 고용의 총량도 증진시키고 이동성도 원활히 해 주며, 때론 비적임자들을 잘 솎아내 적임자들로 채울 수도 있게 해 기업의 경쟁력 증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논리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은 한편에선 양극화의 몸살을 앓고 있고, 다른 한편에선 고용 창출력의 부재 속에 갑갑해 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타개할 묘안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왜일까?

그 이유는 오늘날 다수의 대중들은 ‘질 좋은 고용기회’에 대한 기대와 필요를 강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요구가 큰 사회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파견근로나 기간제 고용 등 이른바 비정규직은 현실에서 노동권의 큰 축소를 감내한 일자리이다. 동일한 노동을 수행함에도 고용계약의 차이로 인해 정규직에 비해 질 낮은 조건과 처우가 주어진다. 단지 정규직보다 못하다는 상대적 격차의 문제뿐 아니라, 그러한 일자리를 취했을 때 돌아오는 보상이 정상적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계획하고 영위하지 못할, 절대적 수준 미달의 상황이다. 그러한 억울함을 집단적으로 제기할 조직적 힘조차 극히 미약하다.

현실에서 비정규직이 차고 넘칠 정도로 늘다 보니, 이제는 그들이 오히려 정상적이고, 종래의 정규직은 마치 특혜를 누리는 존재인 것처럼 착시현상이 발생할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상해고의 도입은 그러한 정규직의 ‘특혜(?)’ 내지 마지막 보루를 건드리는 공격적 조치로 받아들여진다. 이 역시 질 좋은 고용기회를 기대하는 대중들의 현실적 열망 앞에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이렇게 새로운 일자리 기회와 보다 나은 질서를 향한 대중들의 열망에는 그간 한국식 노동시장 유연화가 그 이면에 ‘노동의 사회적 시민권(social citizenship)의 잠식‘을 초래한 것에 대한 피해의식과 비판의식이 진하게 묻어 있다. 이제 그간 훼손된 대중들의 권리를 어떻게 증진시키고 만회해 줄지에 대한 청사진부터 내 놓지 못한다면, 한국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는 명목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현실적 대안이 되기 힘들 것이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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