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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외면하는 수사기관] “승진 유리” 보안ㆍ경비 선호… 치안ㆍ형사사건은 외면

입력
2017.08.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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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정폭력으로 고통받은 여성

사망 전 수차례 112 신고에도

형식적으로 출동ㆍ기록도 안 남겨

해마다 30여명 직무태만 징계

#2

형사 직무 홀대에 인력난 심해져

행정업무에 민원인 상대 벅차

막내 팀원이 40대인 부서도

징계 소식엔 “누가 걸렸네” 냉소

2014년 11월 경기지역에서 한 여성이 가정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다. 남편의 폭행은 이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피해자는 사망 전 수차례 112에 신고를 했다. 하지만 관할서 경찰의 출동은 형식적이었다. 1년 새 한 가정에서 가정폭력으로 2회 이상 신고가 접수되면 ‘가정폭력 재발 우려 가정’으로 지정해 별도 관리해야 하지만 출동했던 경찰관은 112신고시스템에 아무것도 입력하지 않았다. 또 가정폭력 신고의 경우 남편이나 부모 등 가해자를 의식해 피해 진술을 제대로 못할 수 있어 112신고처리 후 상황을 재확인하는 리콜서비스도 하도록 돼 있지만 경찰은 2번 신고 모두 리콜을 하지 않았다. 반복된 폭력 끝에 아내는 사망했다.

2012년 7월 경기지역의 한 자동차부품업체 공장에서 회사 측의 강압적인 직장폐쇄가 빚어졌다. 새벽 사측이 2,000여명의 사설 경비업체 용역을 투입해 폭력을 행사하자 대치하던 노조 측은 30여분간 수차례 112에 전화해 “사측 용역경비원들이 회사에서 (물리력으로) 공격을 하고 있다”고 신고했다. 하지만 신고 내용을 접수받은 경찰은 이를 묵살했다. 관할 경찰서의 당직관이나 서장에게 아무 보고를 하지 않고 방치한 사이 중상 10여명을 포함해 30여명의 노조원이 다치는 유혈 폭력 사태로 끝났다.

부실수사 징계에 현장에선 냉소만

목숨을 담보 잡힌 채 국민을 지키고 범인을 잡는 검경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본연의 임무인 범죄 수사를 외면하고 방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강 건너 불 보듯 하며 미적거리다가 위 가정폭력 사건처럼 생명을 잃는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거나, 대구 여대생 사건처럼 범죄자를 눈앞에 두고도 처벌 못하는 한을 남긴다. 어떤 조직에나 있는 소수 개인의 문제라고 넘기기엔 그 폐해가 너무나 심각하다. 피해 당사자와 가족들은 돌이킬 수 없는 고통과 회한에 시달리고, 국가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심각한 수준으로 끓어오르게 된다.

직무 태만으로 징계를 받는 경찰관은 끊이지 않고 나온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입수한 최근 5년간 ‘경찰 징계 및 소청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2년 41건, 2013년 33건, 2014년 33건, 2015년 29건, 2016년 상반기 6건 등 사건 방치, 수사 소홀, 임의 종결 등을 이유로 해마다 30명 안팎의 경찰관이 징계를 받았다. 대부분 범죄 신고에 소극적으로 혹은 의례적으로 대처해 범죄 피해를 키운 일들이다.

이런 사건과 징계 소식이 알려져도 현장의 분위기는 냉소적이다. “뉴스를 통해 징계 사실이 알려지면 ‘또 누가 걸렸나 보네’하고 맙니다. 본청에서 사례집을 만들어 내용을 전파하지만 당장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꼼꼼히 볼 수나 있겠습니까. 사례집에 들어있는 사건들은 시간 장소만 다를 뿐 대부분 뻔한 내용입니다. 각자 알아서 대비하고 조심하라는 식이죠.”(현직 경감 A씨) “나한테 떨어진 일만 사고 안 나게 하는 게 최선입니다. 전에는 같은 팀원이 맡은 일도 잘 안 풀리면 자기 일처럼 나서서 같이 풀어 보려 했지만 이젠 그런 분위기는 없어졌죠. 괜히 말썽 나면 다 같이 ‘관련자’로 찍혀 징계니 뭐니 시끄러워지니까요.”(경력 18년 차 서울 경찰서 형사 B씨)

수사 현장의 냉소적인 분위기는 형사 직무가 홀대받고 상시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현실이 적잖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때 형사는 ‘경찰의 꽃’이라 불렸지만, 험한 일을 피하려는 사회 분위기와 함께 찬밥 신세가 된 지 오래다. 강력범죄 예방과 범인 검거에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각종 집회, 시위에 동원되고, 행정 업무는 많고, 민원인 상대까지 해야 하는 등 업무는 끝이 없다.

서울 C경찰서의 경우, 현재 형사 인력은 할당된 정원 55명에서 4명이 모자라는 51명이다. 지난해는 정원 57명에 배치 인원은 54명이었는데 3명이 또 줄었다. 강력범죄 담당은 더욱 꺼리는 분위기다. D 형사과장은 “인사 때마다 형사 인력 구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고 답답해 했다. 지구대 근무자 중 형사 출신을 데려오려 해도 가정사 등 여러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기 일쑤고, 심지어 스스로 수사 경과를 포기하겠다고 하는 경우까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인력이 부족하니 형사과, 여성청소년과 담당이나 지구대ㆍ파출소 근무자들은 초동 대처에 혼자 나서는 경우가 많다. 현직 총경 E씨는 “사건 초기에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꼼꼼하게 대처하는 것이 사건 처리의 핵심”이라며 “초반에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팀플레이가 필요한데 최근엔 이게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경찰이 인권 강화를 내세우며 과거보다 더 많은 사건 관련자를 만나고 증거를 수집해야 하지만 한 명이 너무 많은 사건을 도맡아 하느라 수사가 부실해질 가능성은 더 커지고 있다.

정권 관심사 집중하느라 민생 뒷전

하지만 인력 부족이 수사 태만의 모든 이유라고 하기는 어렵다. 부족한 인력을 어느 사건에 우선적으로 배치하는지를 살펴보면 승진과 평가에 유리하거나 정치권과 세상의 관심이 집중될 만한 사건에는 적극 매달리지만, 평범한 민생치안 사건은 우선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안진걸 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은 경찰이 집회 시위에 너무나 많은 인력을 투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 동안 집회 시위 관련자들이 경찰에 많이 연행됐습니다. 더구나 전두환, 노태우 정부 때도 있었던 훈방 조치는 사실상 사라졌어요. 검찰은 최소한 불구속 기소를 목표로 수사를 지휘하고 경찰은 그나마 부족한 수사 인력을 집회 사건에 집중했죠. 얼마나 수사 인력이 부족했으면 저조차 집회장소 관할 경찰서가 아닌 집 주소 관할에서 조사를 받았겠습니까.”

경찰 내부에서는 정보, 보안, 경비 분야가 과거보다 승진에 유리하고 강력 범죄를 맡는 형사보다 근무 환경도 좋다는 이유로 선호하는 분위기다. 안 처장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10명이 기자회견을 하면 정보ㆍ보안과 형사들에 경비 인력까지 최소 경찰 40~50명이 출동한다. 경찰이 집회 관련 인력만 늘려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장애인과 아동, 여성, 노인 등 약자들이 피해를 본 사건들이 뒤로 밀린다. 피해 조사를 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사건인데다, 소홀히 수사해도 문제제기를 잘 못하는 목소리 작은 이들이다.

젊은 경찰 중 형사 희망자가 줄면서 현장 인력의 노령화도 심각하다. C경찰서의 경우 형사 51명 중 20대는 단 5명(10%)에 불과했고, 50대 이상이 17%로 이보다 많다. 2인 1조의 팀원이 50대와 40대 형사로 구성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어떤 부서는 막내 팀원이 40대인 경우도 있다. 20년 경력의 F 형사는 “젊은 형사 인력이 점점 줄다 보니 수사팀의 신구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런 인적 구성은 성 범죄와 가정폭력 사건 등에서 피해자 입장을 공감 못하거나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수사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수사 태만에 처벌은 솜방망이

그런데도 직무 태만에 대한 처벌은 가볍고 시스템 개선은 수박 겉핥기 식이다. 위의 2014년 가정폭력 사망 사건의 담당 경찰은 ‘감봉 1개월’ 징계 결정이 나왔다가 소청을 통해 ‘불문경고’로 흐지부지됐다. 유혈 직장폐쇄 신고를 무시한 경찰은 ‘감봉 1개월’ 징계에서 ‘견책’으로 하향 조정됐다. 이에 대해 이재정 의원은 “잘못을 저지른 경찰에 대해 소청 절차를 거쳐 징계 수위를 낮추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며 “처음엔 비판 여론을 의식해 당사자 몇 명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 뒤 나중에 은근슬쩍 징계를 낮춰 경찰 내부에서 경각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경찰청은 사건 처리를 잘못한 경찰관을 징계하고 해당 사례를 정리해 전국 경찰에 이를 전파한다. 6개월 혹은 1년에 한 차례씩 별도 교육도 진행한다. 하지만 이런 대책으로 수사 태만을 막지는 못하고 있다.

6월 발족한 경찰개혁위원회 위원(수사개혁분과)으로 활동 중인 서보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는 “국민들이 경찰에게 바라는 주요 임무는 민생치안 유지와 사건사고에 대한 발 빠른 대처인데도 이는 소홀한 채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일만 열심히 하려니 스스로 신뢰를 잃어 가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경찰이 수사권 조정을 추진한다면서 정작 수사 인력이나 그들의 수사 전문성을 확보하지 않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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